그러나, 아키히토 현 덴노(天皇)는 2001년 12월 67세 생일을 맞이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간무천황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 자손이라는 기록이 있고, 한국과의 연고를 느낀다”고 발언했다.
자신들의 본류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아키히토의 덴노의 이 같은 발언은 만세일계(万世一系)를 주장하는 일본 우익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이 존립 근거로 삼는 천황제 및 황국사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발언이었다.
당시, 이 발언은 일본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천황제를 터부시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본언론은 이 사실을 조용히 묻어버렸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천황가의 만세일계란 거짓이며 엄연히 백제계 후손임을 인정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사 연구자 우다 노부오(58)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우다 노부오 씨는 "고대 일본의 로열패밀리는 오로지 백제왕족이어야만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지난 97년 '일본이 백제의 꽃밭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백제화원(百済花苑)'이란 책을 한일양국에 출간해 화제를 모은 그는 현 천황가가 백제의 후손일 뿐 아니라, 천황가내의 제사의식조차도 한반도에서 왔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기후에서 태어나 나라공과대학을 졸업, 소니에서 엔지니어로서 3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한일고대사를 소설로 유쾌하게 풀어낸 그는 지금도 한일간의 고대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오는 9월 대백제전이 열리는 공주・부여에 일본사람들을 이끌고 찬란한 백제문화 탐방에 나설 예정이다.
제이피뉴스는 대백제전을 앞두고 우다 노부오 씨를 만나 고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
"4-5년 됐다. 현재, 대학에서 사무일을 보면서 연구 및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 한국에서도 출간된 백제화원은 소설이긴 하지만 일본 천황과 왕족들이 백제인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 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이 어떻게 달랐는지 파헤치는 등 따분한 역사서와 달리 당시의 사회상과 분위기를 실감나게 보여줬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백제화원'을 쓴 계기는 무엇인가?
"내 부모도 옛날 교육을 받아 황국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원래 한국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별다른 근거 없이 부모가 늘 조선인이 어쩌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奈良)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같은 클래스였는데 처음에는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다가 친해졌다. 그런데, 그 친구가 아주 멋있는 녀석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생각해왔던 '한국'이라는 것이 부모가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부모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역사에 의문을 가지고 일본서기를 펼쳐보니, 이건 '조선서기'가 아닌가? 그것이 계기다."
- 일본서기는 일반인들도 쉽게 보나?
"일본서기, 고서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보통사람은 관심이 없다. 일본서기에 일본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서기의 내용 삼분의 일은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해서 적혀있다. 이 이야기를 일반인들에게 하면 놀랄 것이다."
- 이공계 출신이면서 일본서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특이한 경우 같은데...
"나라에 대학을 다닐 때는 역사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계기는 글을 쓰면서부터다."
- 글을 쓰면서부터란?
"소니에서 컴퓨터 메모리쪽 엔지니어 일을 했다. 방송국에 쓰이는 천만엔짜리 비디오 카메라 도면을 컴퓨터로 그린다거나 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스트레스 해소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피곤한 일이 있던 날이면 다른 사람은 술을 마시거나 했지만 나는 글을 썼다. 예를 들어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악역으로 설정하고 소설속에서 분풀이를 한다거나."
- 백제화원도 그런 가운데서 나온 것인가?
"그렇다. 물론 준비기간은 꽤 걸렸다. 나는 이공계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아날로그인 문장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한 것도 있고, 논리로 추구하는 것은 이공계가 더 잘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왜 대규모 병력을 보낸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했는데도 일본 내 정권은 쓰러지지 않았던 것일까, 이런 부분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꿰어맞춰봐야 하니까. 역사소설이란 이공계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부분도 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고대 일본 조정이 모두 백제인이었으며 백제어를 썼다고 하는데.
"맞다. 당시 궁정은 모두 백제말을 썼다. 여기서 궁정이란 천황 및 황족 패밀리 등 로얄 패밀리를 뜻한다. 소설 안에서도 백제말을 못 알아들으면 놀란다거나 하는 내용이 있다. 지배층의 핵심 언어는 백제말이었다."
- 백제어를 썼다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의 나라현, 그 당시 궁전이 있던 '아스카무라(飛鳥村)'는 백제대사라고 불리는 절이 있었고 백제관음도 있었다, 강도 백제강이라 불렀다. 궁극적으로 수도에 백제궁전이 있었다. 이런 이름은 지배층과 관계없이 붙일 수가 없다. 즉, 백제인이 한반도에서 건너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인간만 오고 언어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전례가 있다. 중세, 프랑스의 노르만인이 영국을 정복했을때 왕궁에서 상류층은 모두 프랑스어를 썼다. 영어의 school 등의 단어에 프랑스어가 들어가 있는 게 그 예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배층은 말을 바꾸지 않고, 무덤을 바꾸지 않는다."
- 또 다른 근거는?
"일본서기가 백제를 칭찬하고 있고, 신라는 깎아내리고 있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또한 상당 기간 사절이 와도 통역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660년 백제가 망하고, 한반도가 신라로 통일된 후로 교류가 끊어진다. 그 후 일본에서는 직접 중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게 됐다. 그때 조난율도 많았다는 것도 증거. 예전처럼 한반도의 해안선을 따라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663년 일본에서 4만명을 구원병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인구로 치면 100만명 정도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수많은 배를 건조했다. 게다가 아스카에 있는 조정(몇천명)이 2개월에 걸쳐 전부 규슈로 이동, 참모본부를 두었다. 보통 막부시대의 쇼군(将軍)이라면 이해가 가나, 국가 자체가 궁전을 짓고 싸운다는 것? 백제와 관계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신라나 고구려가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모른척 했다."
- 백제 멸망 당시 일본 조정이 왜 구원병을 보냈다고 생각하나?
"자신들이 일본국민을 지배하는 근거가 백제의 왕계라는 것이었다. 그 본거지가 사라진다는 것, 그 근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큰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4만명이 거의 전멸했다. 당나라는 4-50척이라고 해도 세계적인 함대였고 일본이 파견한 배는 400-500척라고 해도 급조된 것으로 상대가 안됐다. 보통 이렇게 병력을 파견하고 나서 철저하게 패배해버린 왕조는 무너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카노오에 왕자가 백제계였기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병을 보내지 않고 그냥 놔뒀다면 그게 더 여론이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국이 멸망하고 있는데 나카노오에 왕자가 아무것도 안한다? 그게 더 문제였다는 말이다. 즉 조국을 구제해야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 결국 대실패로 끝났지만 여론이 납득했기 때문에 정권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일례로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고 영국 상선이 가라앉았다. 영국이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그때까지 팔짱을 끼고 있던 미국은 참전을 결정한다. 1차대전때 50만명을 배로 보냈다. 만약 미국이 독일이민으로 만들어진 나라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때 피로 연결된 동족의식의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 그런 뿌리를 가진 일본은 140년전 메이지유신 후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가자는 '탈아입구'를 주창했다.
"맞다. 서구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고 아시아를 멸시하는 것으로 해결한 것이다."
|
- 백제는 일본에서 '구다라'라고 부른다. '큰 나라'라는 한국어가 '구다라'로 변했다고 하는데.
"나는 '큰나라' 보다는 '그대의 나라'가 변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기미가요(君が代)에서 말하는 君 '기미' 즉 왕을 뜻하는 '그대'가 변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구다라'는 '그대의 나라'가 변한 말이라는 것이다."
- '그대의 나라'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가설로는 당시 기록하는 서기관이 백제지배층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붙였던 것이라고 본다. 일례로 신라는 시라기(신라), 고구려는 고쿠리(고구려)라고 불렀다. 그런데 백제만은 백제라 부르지 않았다. 왜 그럴까 '나의 나라'가 아닌 '그대의 나라'가 더 높은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어로도 '큰나라' 보다 '그대의 나라'가 더 가깝지 않는가."
- 백제화원을 쓸 때 누군가의 조언을 받았나?
"조언은 전혀 없었다. 혼자서 썼다. 다만, 그 책을 내기 위해 관련 서적을 1,000권 정도 읽었다. 자료는 사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고. 물론 전부 일본쪽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 일본서기를 독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일본서기는 원문이 아니라 해설서를 참조했다. 원문은 전부 만요가나와 한자로 되어 있어 어렵다. 물론 해설서도 읽기는 쉽지 않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정부의 기록이니까. 90프로가 따분하다."
- 쓰면서 고생한 부분은 없었나?
"당시 여자들 복장 그게 좀 어려웠다. 상상력을 동원해야했으니까. 그렇게 뒤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당나라 시대의 복장을 참고해서 썼다."
- '백제화원'은 어느 정도 논픽션인가?
"물론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스토리상 일어난 일과 사건은 모두 일본서기에 적힌 순서대로 썼다."
- 일본내 반응은?
"일본쪽 반응은 좋았다. 3쇄까지 갔다. 독자로부터 편지도 꽤 왔다. 종래의 황국사관이 많이 달랐다는 내용과 재미있었다는 반응이었다. 러브스토리가 주를 이루다 보니 여성 독자로부터의 반응도 좋았다."
- 이 책이 우익들로부터 반론받거나 했나?
"없었다. 재미난 점은 우익들은 책 안 읽는다는 점이다. 특히 황국사관에 젖어있는 사람들일수록 책을 읽지않는다. 오히려 이걸 바탕으로 연구하는 대학 교수를 2-3명 만난 적이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 고사기(古事記)는 참조하지 않았나?
"고사기는 일본서기보다 더 오래된 자료지만, 민간전승에 가깝다. 일본서기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므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썼다. 물론 고사기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양쪽을 비교해서 읽다보면 두 책에서 똑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 그래도, 일본에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전국시대나 메이지유신 전후 시기에 관심이 많은데 일본서기는 조금 뜬금 없지 않나?
"가장 큰 이유는 전국시대나 에도시대 등은 막대한 자료가 있다. 즉 상상력을 발휘해서 놀 수가 없다. 사실(事実)을 따라가도 힘들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단 한 권이므로 여러가지 놀이가 가능하다. 1년에 세 가지 사건만 적혀있기도 하고, 많아 봤자 한 해 10가지 정도의 사건 밖에 적혀있지 않다. 게다가 그 내용도 단순하게 몇 월에 무엇을 했다. 몇 월에 무엇을 했다라고 적혀 있는 정도다. 그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이다.
반대로,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로 오면 방대한 자료로 인해 자칫하면 몇월 몇일 이건 틀렸지 않느냐고 추궁당할 수도 있다. 학자들은 자료를 잘 활용하기 때문에 반론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 같은 재야연구자는 자료가 많은 시대와 맞서기 어렵다. 역사적 자료가 많은 측이 이기지만, 결론적으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 한국 현지 취재는?
"현지 취재는 없었다. 쓰고 나서 한국에 갔다."
- 현지에 가니까 어땠나?
"부여에서 감동했다. 너무 아스카와 닮아서. 한국은 한 10 번 간 것 같다."
- 부여와 아스카가 어떤 점이 닮았나?
"부여의 산이 전부 아스카지역의 산의 형태였다. 아마 백제인이 아스카에 왔을 때 역시 자신들이 살았던 곳과 닮은 곳에 수도를 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
- 요즘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고대사 강연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까치에 대한 이야기로 고대사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
"까치는 일본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까치가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았다'라고 적힌 부분이 있다. 공식적인 역사서에 일부러 한 항목을 두고 그런 것을 적어두있다는 것은 기록하는 사람이 까치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고향의 새가 이곳까지 날아와서 알을 낳았구나'라는 내용을 어떻게서든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이 일본으로 이주해왔다는 증거다."
- 한반도에서 꼭 백제계만 넘어온 것은 아니다.
"맞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백제계와 신라계가 동시에 왔다. 그러나, 먼저 아스카에 먼저 자리를 잡은 지배자는 백제인이었다. 당시 서일본은 따듯하고 비옥했으며 교통편이 좋았다. 그러나 동쪽은 산이 험해 개발하기도 힘들었고, 추웠다. 거의 원야였으니까. 내 추측이지만 지배계급인 백제인은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건너오면 백제출신은 여기에 있어라하고, 신라인은 추방은 아니지만 동쪽으로 가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신라계는 고생하면서 일본의 동쪽을 개발하게 됐다고 본다."
- 즉,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은 백제계, 도쿄를 중심으로 한 동일본은 신라계가 자리를 잡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내 생각이지만, 일본의 역사는 백제인과 신라인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오늘날 일본은 동일본(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권)과 서일본(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권)을 크게 갈리는 것도 그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국도 전라도와 경상도 양쪽이 말이 다르지 않나? 지금도 다르지만 옛날에는 더욱 달랐을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도 서일본과 동일본의 일본어 악센트가 정반대다. 그 이유에 대해 어떤 학자도 모른다. 내 가설로는 서일본에는 백제계가 많았고, 동일본은 신라계가 많아서 그게 각각 발전한 것으로 본다.
일본인은 두 지역 언어 차이를 못느끼지만, 유럽사람에게 물어보면 악센트가 스페인어와 포루투칼어보다도 다르다고 한다. 만약 유럽이었다면 간사이어, 간토어 등 두가지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악센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오사카에 가서 간토식 억양으로 비가 온다고 하자, 사탕? 안 떨어지는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일본어로 비를 뜻하는 아메'あめ'는 '사탕'이라는 뜻도 있다) 대부분 악센트가 서로 정반대다. 양쪽이 그 만큼 달랐다."
- 당시 일본은 그만큼 한반도와 밀접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한국의 삼국 역사를 보면, 중국 삼국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제의 힘이 커졌다가, 그 다음에는 고구려의 힘이 세지고, 마지막은 신라가 강해지고. 그것을 고스란히 일본서기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 고대 일본의 지배층과 지금 덴노(天皇)와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 예를 들겠다. 1989년 지금의 헤이세이 천황 즉위식때 제단 위로 올라가서 30분 정도 자신이 천황이 되었다고 신에게 보고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유독 그곳에만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 조선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은,-는 등의 말이 들어간 문구를 읊었을 것이다."
- 보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면?
"있다. 전후 기마민족이동설로 일본역사계에 화두를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선생이 쇼와 천황(히로히토)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죄송합니다. 폐하에 대해 반도에서 왔다는 등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쇼와 천황은 '아니야, 우리들도 조선출신이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에가미 선생은 그것이 일생에 가장 충격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 이야기를 에가미 나미오 씨로부터 직접 들은 것인가?
"에가미 나미오 선생이 한국의 김용운 교수에게 직접 이야기했고, 김 교수로부터는 내가 직접 들었기 때문에 틀림 없다.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근거가 또 있다.
첫번째 '어머니'를 일본어로 오카아상이라고 하는데, 황실에서는 '오모'라고 말한다. '오모'는 어머니가 아닌가. 두번째, 천황계에서 젓가락을 잘 쓰지 않고 숫가락을 쓴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의 기본적으로 앉는 자세인 정좌(正座)를 하지 않는다. 즉 무릎을 꿇지 않고 양반다리를 한다는 점이다."
- 일본과 고대 한반도와의 관계를 밝혀줄 고분은 현재도 발굴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렇다. 황실업무를 주관하는 궁내청이 고분발굴을 못하게 하고 있다. 예전(쇼와시대)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유물이 마구 나오니까 그게 싫어서 그랬는데 지금은 그게 본질적인 이유가 아니다."
- 지금은 어떤 이유로 막고 있다고 생각하나?
"진짜 이유는 유전자 분석 기술이 향상되어서, 현재 황태자의 타액만 가지고도 126대 위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y염색체란 아버지로부터 남자아이로밖에 이어지지 않으니까. 과거 천황 묘의 뼈와 비교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런데, 이게 다르면 만세일계가 부정되니까. 즉,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유물 이전에 과학적으로 규명될까봐 궁내청이 절대 반대하고 있다."
- 우노 선생은 만세일계는 현실성이 있다고 보는가?
"사실 그런 검증절차가 없더라도 천황의 만세일계는 단절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일본 우익이 만세일계를 정말로 주장하고 싶다면, 여성천황 밖에 없다. 어머니로부터 여자아이가 태어나는 경우의 수는 오로지 하나니까."
- 만세일계가 무너지면 일본에서 큰일나는가?
"아마도...한국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일본 내에서는 만세일계에 기대는 사람이 꽤 있다. 우익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물론 생물학적으로 믿지 않겠지만, 만세일계가 갖는 긍정성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로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되면 빅뉴스가 될 것이다. 물론 나도 고분 발굴은 찬성이다. 남계가 어디서 확실하게 단절되었는지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 덴노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일본에서는 터부인 것 같다.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다. 황실 자체의 이름에 걸맞는 것이라면 찬성한다. 일본역사에서 메이지유신 이후 가장 큰 실수는 천황이 대원수(大元帥)가 된 것이다. 대원수란 천황보다 상당히 낮은 신분이다. 무장(武将)의 대표라는 뜻이니까. 그게 대실패의 원인이었다.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때 황실을 사라지게 할 정도까지 만들었다. 결국 자기가 자기 목을 조른 것이다.
- 전쟁도 끝났고, 황국사관도 이미 대중적으로 소멸됐는데, 일본정부와 일본사회는 왜 그렇게 감추려 하나?
"황실, 황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천황가가 만세일계니까 존엄하고 존중받아야한다고 궁내청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왕실도 200년 밖에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왕실이 해야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국민에게 새로운 이미지나 놀라운 이벤트를 일으키는 일이다. 서민은 그날 그날의 생활이 힘들다. 서민들은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니까, 그런 경쟁사회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왕실의 일이다. 10년에 한 번 정도라도 된다."
-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예가 들겠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프리카 대통령을 초대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 대통령이라고 해도 토인의 추장 같은 사람이었다. 그를 초대한 만찬에는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가놓은 그릇, 워터볼이 있었는데 아프리카 대통령이 그걸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영국의 외무대신, 상원의원들이 '저런 야만적인...'이런 표정으로 인상을 찌뿌리자, 엘리자베스 여왕이 보란듯이 그 워터볼의 물을 들이마셨다. 왕실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인품이 사람들을 따르게 한다. 서민은 일상생활이 바쁘니까 그런 것을 못하지만, 왕실은 품격 있는 것을 해야한다."
|
-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메이지유신도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이념이 중심이었는데?
"존왕양이라고 해봤자 야마구치현의 무사들이 막부타도를 위해 내세울 명분을 없다보니 황실을 가져온 것 뿐이다. 그래도 메이지유신 후 그대로 천황을 교토로 놔두었어야 했는데 도쿄로 가져왔다. 이것이 문제였다. 본질적으로 일본군국주의의 핵심이었던 '대일본제국'에 대해 실은 제국이 아니었다는 거다."
- '대일본제국'이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이란, 자유(리버럴)을 핵심적인 운영 원칙으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제국을 찾아보면 엄청나게 자유롭다. 제국이란 제국의 밖에 있는 백성들은 엄청 심하게 다루지만 제국 안에 있는 다민족 백성들에게는 종교의 자유 등 여러 자유를 준다. 이렇게 많은 자유를 주지 않으면 제국은 성립되기 힘들다. 제국 내 여러민족이 스스로 제국을 떠받들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지 않으면 망한다. 즉, 대일본제국은 대일본왕국이었을 뿐이었다.
일례로 대일본제국은 일본민족만을 위한 것으로 조선에서 온 대신은 아무도 없지 않는가. 정말로 일본이 제국이 되고 싶었다면, 조선일본 연합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처럼 했어야 했다. 게다가 황태자는 일본에 살면 안되고 서울에 살아야했다. 웨일즈의 황태자처럼. 웨일즈는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지만 황태자가 있음으로써 영국을 위해서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시대 이루어진 '창씨개명'도 말도 안되는 소리다. 제국이란 다민족의 문화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니까. 제국이란 엄청나게 리버럴한 지배를 하고, 그 리버럴한 지배를 통해 얻는 에너지로 밖을 정복하는 시스템이다.
몽골도 제국 밖에서는 심한 일을 했지만, 내부에서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로마제국도 이스라엘인이라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했다. 로마가 기독교를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방침이었던 자유 이념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 한국어 공부는?
"한국어는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긴 했지만 못한다."
- 소니를 다니면서 와세다 문학부를 정식으로 졸업했는데?
"2003년 입학해서 2007년 졸업했다. 낮에 소니에서 5-6시 일을 끝내면 학교로 가서 6-9시까지 4년간 공부했다. 다들 6년 걸리기도 하는데 나는 열심히 해서 4년만에 졸업했다. 정식 학사다."
- 이미 '백제화원'이라는 책을 냈는데 굳이 문학부에 들어가려고 했던 이유는?
"원래 대학 문학부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교 때 '문학부 따위 먹고 살기 힘들다'라며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아버지도 기술자였고, 그래서 그냥 공대를 갔다. 그후 소니에 들어갔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인생인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때마침 소니 본사가 가나가와현의 아쓰기에서 도쿄의 시나가와로 옮겨왔다. 와세다까지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됐다."
- 지금 연구하는 테마가 있는가.
"발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당시 발해에서 일본으로 십 몇차례 사절단이 왔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다. 발해와 일본의 동북지방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또 나라가 힘들 때 원조를 구하러 오기도 했다. 즉, 당시 일본과 발해가 친하지 않았다면 원조요청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건국에 일본도 관계한 게 아닐까."
-오는 9월 대백제전에 간다고 하는데.
"가이드 역할로 일본인 관광객을 데리고 역사기행을 할 예정이다."
- 대백제전에 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서울, 경주, 부여는 가봤지만, 공주는 처음이다. 사람들에게 여러 유적을 설명하고 백제의 역사, 삼천궁녀 등을 설명할 것이다. 이번에는 꼭 무령왕릉을 다녀올 것이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최근 첫 공주 방문을 앞두고 무령왕에 주목하고 있다. 우다 씨는 무령왕이 '아시아의 투탄카멘'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무령왕에 대한 관심은 최근 한일문화경제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