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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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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현 기자
기사입력 2009-06-14

일본에 온지 8년째인 나는 일본인 여성을 만나 7년전에 결혼했다. 웬만하면 적응될 만도 한데 아내나 처가쪽 식구들, 아내의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놀랄 때가 있다. 
 
아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전형적인 일본인에 속한다. 그런 아내가 갑자기 외국인(나)과 결혼한다고 했을때 다들 걱정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의 죽마지우는 "너 잘 알아보고 결혼해야지. 사기결혼이면 어떡할려고?"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하긴 사귄지 한달만에 동거를 했고, 또 6개월만에 결혼한다고 하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또 혼인신고를 한 2002년 8월 22일은 내 비자가 끊기는 9월 12일의 불과 20일전이었다.
 
친구들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게든 비자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제3세계 외국인의 위장결혼작전에 가련한 일본인 여성이 속아 넘어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상상해도 충분했다. 게다가 저번 글 "일본경찰들 제발 반말 좀 하지 맙시다"에서 밝혔듯이, 상당히 더러운 내 인상도 그 시나리오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절대 생각조차 못했을 아내와 나만의 비화가 있다. 지금도 내 머리속에 선연히 남아있는, 마치 한여름밤의 꿈같은 얘기일 수 있는데, 그걸 지금부터 좀 풀어보려 한다.
 
혼자서 나대기 시작하면 지는거다. 쿨해지자.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일본에 왔던 2001년 당시 기숙사나 일본어 학교의 한국애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여자와 사귀고 싶어했다.
 
사귀고 싶어했던 목적도 다들 제각각이라서 뭐라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암튼 개중에는 "우리가 당한 걸 생각하면 일본여자를 정복해서 복수해야 한다"는 극우(?)도 있었고 "아야나미 레이(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여자만 있다면 모든 걸 바칠꺼야"라는 오타쿠도 있었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게 아니더라도 "일본어 회화를 배우려면 역시 일본녀랑 사귀는 게 좋겠지?"라는, 사랑이나 연애보다 일본어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내 주위만 그럴 수도 있는데 이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지난 8년간 살아오면서 만난, 이제 처음으로 일본에 발을 디딘 후배들 중에 "일본여자랑 어떻게 하면 사귈 수 있어요?" 라고 물어오는 녀석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일본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물어올 수가 있다. 
 
나에게는 이런 질문이 마치 국적보고 사귄다는 말처럼 들려 짜증날 때도 많았다. 이건 아내의 친구들이 걱정했던 "사기결혼"과 거의 비슷한 말이기도 한데, 그러니까 사귄다는 행위에 왜 '국적'이라는 요소가 들어가냐는 불만에서 오는 거다.

하지만 나도 2001년 당시에는 일본인들과의 술자리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아, 물론 일본녀를 사귀자는 목적보다는 그냥 일본인들이 무슨 생각가지고 살아가는지는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가진 술자리 거의 대부분이 한국과는 180도 다른 분위기라서 무진장 재미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여자애들 끼어 있는 술자리에서 절대 금기시되는 군대 이야기가, 이쪽에서는 엄청난 동경의 시선을 받는 안드로메다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이건 누구보다도 냉철한 지금 아내에게도 해당되는 말인데, 아내는 언젠가 내 군대 이야기를 듣더니만 어느새 울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이렇게 말했다.

"오빠, 살아남아 줘서 정말 고마워..."
"아, 그..그래.. "

군대 이야기는 좀 특수한 케이스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재미없는 평범한 이야기라도 대부분의 일본인들, 특히 여자애들은 "아! 그래요?", "이런 이런!", "그래서요?", "우와! 그건 흥미롭네요" 등의 대꾸를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없어도 첫 대면에서, 게다가 그네들 입장에서는 외국인(한국인)들이 열심히 일본어를 써가며 이야기를 하는데 씹거나 흘려 듣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녀가 분위기 안깨려고 넣는 추임새를 한국남이 '저 아이 나한테 관심있는거 아냐?'라고 오버할 때가 있다. 문제는 마음속으로만 오버하면 그냥 넘어갈 것을 진드기처럼 달라붙어서 "오늘 집에 가지 마요",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께요"등의 어설픈 일본어로 '작전'에 돌입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거다. 

처음 일본에 와서 들뜬 마음에 또 일본녀랑 사귀고 싶은 것도 알겠지만, 이건 그 술자리의 분위기를 급하강시켜버림과 동시에 나라를 욕먹이는 행위라는 것을 유념해줘야 한다. 외국에 나오면 다들 국가대표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니 말에 관심 좀 기울여 줬다고 해서 그거 진짜배기아니다. 지난 8년간 수백차례의 술자리에서 수천명의 일본녀들과 썰을 풀어본 선배의 말이니까 이건 일반화시켜도 된다.

아내와의 첫 만남과 헌 책방

자, 그럼 나는 지금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아내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매주 수요일마다 외국인에게 일본어 회화를 가르쳐 주는 볼란티어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아내에게서 일본어 회화를 배우고 있던 외국인은 영국인과 인도인이었고, 나는 그 옆 테이블에서 다른 선생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2주일, 그러니까 2번째 수요일에 통성명을 했다. 명함이나 그런게 없으니 그냥 이름만 외웠는데, 이름이 참 외우기 쉬웠다.

아내) 지난 주에도 봤죠. 매주 나오나 봐요?
나) (상당히 부족한 일본어로) 아직 한달 밖에 안되어서 회화를 좀 배우려구요.
아내) 어머! 한달 밖에 안되었다구요? 잘 하시는데요!
나) 아, 아뇨. 전혀...

세번째 줄에 주목하자. 시츄에이션만 다를 뿐 술자리에서 일본녀들의 대응과 비슷하다는 느낌 팍팍 든다. 이게 바로 일본인들의 사교성 멘트, 즉 "타테마에(建前)"다.
 
나도 사실 이때 아내의 이런 반응에 '어? 혹시?'라는 마음을 조금은 가졌었다. 그래서 이름이라도 물어보자는 용기를 낸 건데 이게 결과적으로는 '오버'가 된 셈이다.

나) 저는 박철현이라고 하는데요. 그쪽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
아내) 다카하시예요.
나) 이름은요?
아내) 아! 이름...미와코예요. 한자로는 이렇게 써요. 美和子
나) 좋은 이름이네요. 아름다울 '미'에, 평화할 때 '화'에 아이(子). 그러니까 아름다운 평화의 아이라는 뜻이네요. 하하하.
아내) ...........아, 네....-_-

통성명만 했을 뿐인데 역효과가 났다. 그렇다고 뭐 그렇게 큰 데미지를 입은 건 아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내와 사귈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썰렁한 공기는 눈치챘지만 그냥 마음에 안두고 넘어갔는데, 사건은 그 다음주에 터졌다.

그날따라 아내가 가르치던 영국인과 인도인이 안왔고, 나를 가르쳐주던 선생도 결석을 했다. 둘다 뻘쭘하게 있기 뭐해서 아내가 나를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그날 주제가 '취미'였다.

아내) 취미가 뭐예요?
나) 영화보는 거랑 게임요. 비디오 게임.
아내) 비디오 게임이 뭐예요?
나) 선생님 그것도 몰라요? 플레이스테이션 같은거.
아내) 아...테레비 게임을 한국에선 비디오 게임이라 하는군요. 좋아하는 게임 있어요?
나) 사쿠라 대전요.
아내) .........-_-;;

아내는 나중에 '사쿠라대전'이라는 지극히 일본적인 게임을 어떻게 알고, 또 주제가까지 부를 수 있었던 건지 상당히 신기했다고 말했다. 여느 보통의 외국인들처럼 '스트리트 화이터'류의 격투게임이 나오리라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사쿠라대전'이 나오고 또 입으로는 '제국화격단'의 테마송을 흥얼거리고 있으니. 

그날 저녁 다른 볼일을 보고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데 아내가 역계단을 내려가고 있는게 보였다. 그런데 순간 뭐라 불러야 될지 감이 잘 안와, 수업중에는 선생이라고 부른다, 엉겁결에 뒤에다 대고 이름을 불러 버렸다. "미와코"라고. 그러자 불에라도 덴 듯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 아내는 이렇게 물어왔다.

아내)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 그럼요. 아름다운 평화의 아이잖아요. 미와코.
아내) ................-_-;;;

공교롭게도 아내가 살고 있던 집은 당시 내가 거주하던 기숙사와도 얼마 떨어지지 않았었고, 물론 같은 전철역이었다. 기숙사까지 같은 방향이었고, 아내는 기숙사에서 조금 더 걸어야만 했다.
 
전철안에서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또 꺼내는 나를 보고 아내는 점점 가까이해서는 안될 사람, 즉 '이상한 외국인 오타쿠'라는 심증을 굳혀 갔다고 한다.(일본녀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떤 한 주제만 자꾸 이야기하면 오타쿠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 기억해 두자. 다양한 꺼리에 대해서 썰을 풀 수 있도록 평소 내공을 쌓아놓자)
 
전철에서 내려 어쩔 수 없이 같이 걸어가게 되었는데, 아내가 갑자기 "나, 헌 책방에 들러야 하는데요"라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물론 '나 너랑 같이 가기 싫거든. 먼저 좀 짜져 줄래?'라는 의미지만, 나는 별 생각없이 "우와! 일본의 헌 책방 한번도 안 가봤는데 나도 한번 가보고 싶어요"라고 응대하고 말았다. 그때 아내의 그 굳은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정말 역사는 아주 엉겁결에 너무나 사소한 곳에서 문득 이루어진다.

나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의 우연적 요소를 부정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세계 1차대전의 원인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의 한 청년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그런 것들. 어차피 황태자가 살해당하지 않아도 구조적으로 그러한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날 정말 별 생각없이 꺼낸 "헌책방 가보고 싶어요!"라는 말 때문에 우리 둘은 사귀게 되었고, 결혼도 했고 또 아이도 둘이나 낳게 되었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인데 말이다.
 
아내와 만난지 만 7년이 지난 지금도 간혹 그때 일을 떠올린다. 그때 만약 아내와 함께 헌 책방에 안 갔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라는 공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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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헌 책방을 갔기 때문에 이 아이들도 태어날 수 있었다    ©j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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