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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말하는 종군위안소 충격적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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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현 기자
기사입력 2010/04/22 [20:03]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마쓰바라 마사루(85)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담담하게 풀어나갔지만 역시 감정의 동요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바 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 제국해군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마쓰바라 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들고있던 손가방에서 당시 자료들을 꺼낸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겉옷 속주머니에서 샛노랗게 물든 명함크기 증명서를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이게 그 때 사용한 군 위안소 출입증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발급받았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받았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가로 5.8센티, 세로 10.8센티의 그 증명서에는 '남국료출입증(南国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안소를 이용할 때엔 이 출입증을 가져가야 해요. 우리 부대 근처에는 두 군데가 있었죠. 하나가 여기 적혀져 있는 '남국료위안소'였고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위안소' 였습니다."

마쓰바라 씨는 "남국료와 남성료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모여있는 시설로 군인, 군속들의 성적욕구 해결을 위한 시설로 사용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도 물론 남태평양 트럭(truck) 제도 일대로 배속된 1943년부터 '남국료'를 몇 번 이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18~25세 정도되는 종군위안부들이 각 위안소에 5, 60명 정도씩 있었습니다. 44년부터는 더 늘어났어요. 마지막에는 아마 각각 70명 정도씩 되지 않았나 하네요. 일본인 위안부가 그중 10% 정도였고 나머지는 전부 조선에서 온 위안부들이었습니다."
 
1942년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에 배속된 마쓰바라 씨는, 43년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 둥지를 틀었다.
 
하루시마, 나쓰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그리고 게쓰요시마, 가요시마, 수이요시마, 모쿠요시마, 긴요시마, 도요시마, 니치요시마 등 총 11개의 큰 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트럭제도는 산호초로 둘러싸인 바다의 요새였다.
 
▲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는 1998년 나카가와 농수산대신의 일본군 위안부 발언으로 인해 이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그는 나쓰시마(夏島)에 주둔했고 이 안에 있는 두 위안소를 관리하는 시설대대 군속으로 일했다. 나쓰시마는 후방보급기지로 그 주변에는 각종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쓰시마를 기준으로 각각 위 아래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아키시마(秋島)는 전투부대가 주둔했다. 양 섬은 물론 나쓰시마에 주둔하는 일본군 및 군속들은 일과가 끝나거나 휴일이 찾아오면 나쓰시마의 두 위안소를 이용했다.
 
"위안소 접수대엔 위안소를 이용하려는 군인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한산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투태세에 들어가거나 중요한 훈련이 있는 날엔 한산했을 수도 있지만 저도 그 땐 작전에 참가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평균잡아서 종군위안부 한 명당 하루에 14, 15명 정도는 받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시간 10분간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위안소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에서 속아서 끌려 온 그녀들"을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목소리가 떨린다.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며 소포를 건네 줬지요. 그 땐 그 정도 였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게 그녀 고향으로 잘 갔는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마쓰바라 씨는 언론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평화운동을 계속 해 왔기에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 
 
하지만 지난 1998년 당시 농수산성 나카가와 쇼이치 장관의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는 발언에 양심고백을 결심했다.
 
구 일본군 군속으로 위안소의 이용자이면서,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가 회고하는, 참혹하고 소름돋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 모처에서 1시간 10분에 걸쳐 진행됐다.)
 
- 오늘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저는 마쓰바라 마사루라고 합니다. 지금은 노랫말을 만들고, 또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있지만 1942년부터 44년까지 남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서 군속으로 복무했지요. 도쿄에서 따진다면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트럭제도는 크게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4개 섬을 하루, 나쓰, 아키, 후유시마라고 불렀지요. 왼쪽은 게쓰요시마를 중심으로 7개 섬이 있었지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외곽길이는 약 240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 위안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병참기지, 그러니까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쓰시마에 위안소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국료(南国寮),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였습니다."
 
- 그 위안소는 누가 관리했습니까?
"나쓰시마 일대가 제4해군함대의 기지였는데 이곳(나쓰시마)는 병참보급기지였어요. 제가 배속된 곳은 제4함대 시설부대였습니다. 부대장은 하기와라 간이치 대좌였지요. 제4함대 시설부대라는 건 제4함대에 소속된 부대입니다. 제4함대 사령장관은 고바야시 마사시 해군중장이었습니다. 제가 배속받은 이 시설부대가 위안소를 관리했습니다." 
 
- 시설부대는 위안소 관리만 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위안소도 관리했지만 본국(일본)에서 넘어 온 죄수들도 관리했습니다. 한 700명 정도? 그들은 주로 잡역을 했습니다. 그 외에 한국에서 그러니까 당시엔 조선인데요. 조선에서도 많은 수의 장정들이 왔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시켜준다는 말에, 그러니까 결국 속아서 온 셈인데 아무튼 다들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유사시 인적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평소에 일을 시킨 것이지요. 아무튼 위안소, 위안부, 죄수 등은 전부 제가 소속돼 있던 시설부대가 관리했습니다."
 
- 보통 시설부대라면 공병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인데 마쓰바라 씨가 있었던 곳은 사람도 관리했다, 그런 의미네요.
"그렇죠. 우린 시설부대니까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도 다 했습니다. 그것도 하고 아까 말한 그런 것도 하고... 사실 뭘 짓고 그러는게 결국 노동력이 필요하니까요. 일본인 사역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더 많았습니다만..."
 
- 시설부대가 위안소도 관리했다는 것인데 당시 위안소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하고 있었나요?
"(겉옷 안쪽 속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며) 이게 남국료 출입증입니다."
 
- 남국료라면 아까 위안소라고 말씀하신...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남국료를 담당했고 또 남국료를 사용했습니다. 이 출입증은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원본입니다.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 출입증 겉면에 적혀있는 내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 적혀있는 건, 먼저 가장 왼쪽이 남국료출입증,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남국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하기와라 부대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부대장 이름이 하기와라 간이치여서 하기와라 부대입니다. 인감이 그 밑에 찍혀 있지요. 원본인데 원래는 반납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데 몰래 가지고 귀국했지요."
 
- 위에 이 번호는?
"그건 발급번호입니다. 갑제511호. 모두 이런 번호가 찍혀져 있습니다. 관리번호지요."
 
- 쇼와 18년에 발급받았네요.
"네. 서기로 따지면 1943년이고, 11월에 발급받았습니다. 발급날짜가 출입증 옆에 씌여져 있는 것이죠."
 
- 1943년이면 태평양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렇죠. 전시상태였죠.(사이) 이듬해, 그러니까 1944년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미군 폭격기의 대공습을 받았어요. 여기, 나쓰시마가 거의 궤멸됐습니다. 위안소도 물론 공습피해를 받았습니다."
 
- 대공습으로 사라질 때까지 위안소는 계속 있었나요? 그러니까 마쓰바라 씨가 처음 여기로 갔던 1942년에도 위안소는 있었던 겁니까?
"계속 있었습니다. 남국료와 남성료 둘 다 있었어요. 각각 5, 60명 정도 위안부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했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습니다. 저는 제4함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남국료를 이용한 것입니다. 여기(나쓰시마)는 또 함대기지였기 때문에 해군장병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언제 출격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겨라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요. 육군은 주로 하루시마(나쓰시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시마에는 죄수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 아까 나쓰시마에 남성료, 남국료 둘 다 있다고 했는데요. 그럼 육군은 배를 타고 와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조그만 배도 자주 왔다갔다 했습니다. 트럭제도 동쪽 4개 섬만 놓고 보면 위안소는 나쓰시마에만 있었으니까.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하루시마, 후유시마(나쓰시마의 남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중이던 군인들은 자주 나쓰시마로 놀러 왔습니다."
 
- 놀러?
"아, 네. 여긴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요코스카 미군기지 같은 그런 개념인데요. 환락가가 있어요. 보통 상점들도 줄 지어 있고, 학교는 물론 신사까지 있었습니다. 일용품이나 그런 건 다 살 수 있어요. 술집이나 요정도 물론 있었지요."
 
- 그 군인들이 나쓰시마에 와서 놀았다는 것은 결국 다른 섬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는 거네요.
"네. 하루시마, 후유시마는 그냥 기지만 있었죠. 그러니까 다들 놀고 싶을 땐 나쓰시마로 건너 왔습니다."
 
- 위안소는 그런 군인, 군속들이 주로 이용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 마쓰바라 씨도...
"네. 저도 물론 이용했습니다."
 
- 위안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나요?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12시부터 22시까지 였습니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납니다. 단, 일반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외 하사관이나 장교, 저희같은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 가는 것도 허용됐습니다."
 
- 위안소는 매일 운영됐나요?
"네. 매일 열었어요."
 
- 공휴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런 건 없었고,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성병검진이 있었어요. 위안부 여성들은 이 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으니까요.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어요.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고 그래라 그런 것이었지요."
 
- 도망가지 못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섬이니까요. 사방이 바다니까..."
 
- 하루 10시간씩 매일 그런 일을 강요해 놓고 한 달에 한 번 시원한 공기 쐬라고 인정 베풀 듯이 그랬다는 건 좀 그렇네요.
"해군은 위안부에 대해서 그나마 그런 감정같은 게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해방감을 맛봐라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30일간 줄곧 한 군데서만 지내야 하니까. 그렇게 병원을 가는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한다고 즐거워했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또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니까. 위안소로 돌아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다들 20살 안팎인 게 참 그 뭐랄까..."
 
- 하지만 마쓰바라 씨는 그녀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또 눈물도 보였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녀들이 위안소에 어떻게 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안부들은 모두 속아서 왔어요. 모집공고가 붙는데 위안부 모집한다는 문구는 그 안에 없습니다."
 
- 그럼 어떤 문구를 넣죠? 그 모집공고라는 것에.
"보통은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던가, 병원에서 사무 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겁니다. 게다가 월급이 30엔,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하니까 다들 응모하는 겁니다."
 
- 월 30엔이면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지금 얼마나 할 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초임,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했을 경우 초임이 45엔이었으니까..."
 
- 30엔이면 꽤 높은 급료네요.
"그렇습니다. 30엔이면 상당히 좋은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거기에 속아서 오는 겁니다. 30엔이나 받는데 숙박료, 식대 다 무료니까 아, 이 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하는 겁니다."
 
- 연령대가 어떻게 되던가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18세정도부터 많게는 25, 6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주 어려 보였습니다."
 
- 아까 한 위안소에 60명정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약 120명이라는 말이 되는데, 국적은 어떻게 됩니까?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그 외엔 전부 한국이었지요. 일본인 비율은 약 10% 정도였습니다."
 
- 90%가 한국인, 그럼 적게 잡아도 조선에서 속아서 온 여성들만 100명 이상이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아까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게 가장 슬프다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외엔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혹시 기억나는게 있습니까?
"보통은 그런 말들인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여기 와 버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속아서 남태평양 섬까지 왔는데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사방은 바다고... 결국 그녀들은 희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저는 군무원으로 왔지만 저조차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했어요. 저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위안부들이 어떻게 자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망적이지요. 또 군에서 그녀들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절대로."
 
- 그건 왜 그런 거죠?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니까요. 고향에 가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모집공고 거짓말이다, 속으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 그러면 평생 여기 있다가 죽어라, 뭐 그런 겁니까?
"그렇습니다. 평생 여기서 그렇게 강요당하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듭니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거지요. 그런데 작전이 끝났습니다. 후퇴를 해야 한다고 칩시다. 그럼 데려갈까요? 아니예요.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갑니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지요."
 
- 섬은 더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네. 실제 44년에 대공습이 있었습니다. 다 날아 갔어요. 위안소는 그나마 피해를 덜 받았지만 대부분의 청사, 창고 등이 폭격을 받았어요. 2000기가 떴으니까 엄청난 공습이었죠. 문제는 식료품이 사라졌다는 것. 물탱크도 박살났고... 하지만 섬이니까 도망칠 데가 없어요. 공습이 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활동하는 '아비코 평화네트'의 회원들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 관련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접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니까 위안소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했을 것 같은데요.
"네. 저는 제4해군함대 시설부대 경리과에 있었지만 위안소 관련해서는 직접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도 했지요. 다른 일도 다 했습니다. 위안소를 위해서 특별히 뭘 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 아까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주셨는데 그건 보급품이나 그런...
"아닙니다. 그건 위안소를 이용할 때 제시하는 증명서 같은 겁니다."
 
- 출입증은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지급받았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출입증은 저같은 군무원만 받습니다. 군인은 이걸 보여주지 않아도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지요. 출입증이 필요없는 겁니다. 저희는 사복도 입기 때문에 이런 출입증을 발급받는 겁니다. 일반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죠."
 
- 요금은 지불하나요?
"네."
 
- 얼마 정도인가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 1, 2엔 정도였던 것 같네요. 아니, 아마 1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일본 우익들 논리중에 하나가 위안부들이 성매매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손을 내 저으며) 그건 말도 안되지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 요금은 위안부에게 직접 건넵니까?
"아뇨. 요금소가 있어요. 나쓰시마에 있었던 위안소, 그러니까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입니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울타리같은 게 쳐져 있어요.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입니다."
 
- 방 번호는 뭡니까?
"위안부 여성들이 거주하는 방입니다. 막사 1개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각 방마다 몇 호인지 적혀져 있어요. 복도 끝은 세면장과 화장실입니다. 방 크기는 하나당 4조(약2평) 정도?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 그럼 그녀들에게 직접 주는 건 아무 것도 없나요?
"네. 방 번호를 건넬 뿐이지요."
 
- 돈을 직접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돈은 요금소에 냅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남국료는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시스템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그 돈이 실제로 위안부들에게 건네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요."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2부 - "군 부대가 위안소 관리했다" 구 일본군 군속 최초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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