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화'
남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가 육지로부터 고립되어 자신들만의 고유한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처럼, 1990년대 이후 세계시장 보다 내수시장에 주력해 온 일본 제조업이 처한 상황을 일컫는 단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비단 1990년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무려 20년이나 지난 2010년 4월 현재도 '갈라파고스 일본'을 도처에서 들을 수 있다.
여전히 세계경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경제대국 일본이 좀처럼 '갈라파고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왜일까?
<니혼게이자이신문>은 4회에 걸쳐서 '틀어 박히지 마! 일본(こもるなニッポン)'이라는 타이틀로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는 현대 일본에 메스를 들이댔다.
이 시리즈는 6명의 기자가 일본경제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날카롭게 분석한 것으로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틀어 박히지 마! 일본
일본이 움츠러 들고 있다. 경제대국이라는 잔상에 사로잡혀 변신을 망설인 일본은 밖이 아닌 안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것은 금세 틀렸다라는 것이 밝혀졌다.
먼저 중국과 인도의 성장이다. 또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없는 디플레이션도 일본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회적 기반도 약하다.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재정불안, 그리고 연쇄적으로 찾아 올 재정파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본을 덮치고 있다.
이 신문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세계를 향해 도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본에 대한 투자가들의 관심,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재정파탄이 언제 발생할 지 예측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작년 12월 미국에 출장한 '크레디 스위스 증권'의 경제 담당부장 시라가와 씨에게 날아 온 질문지. 그 안에는 일본경기나 구조개혁에 관한 질문은 없었다. 투자가들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즉 '일본의 재정이 언제 파탄이 나는가'에만 집중돼 있었다.
시라가와 씨가 만난 해외투자가들은 아시아의 총체적인 전망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일본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라가와 씨가 회상한다.
"그들은 일본을 채권시세 하락으로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리스크투자 대상국'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전세계에 비추어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다."
줄곧 국내총생산량(gdp) 세계 2위를 지켜왔던 일본은 그 자리를 중국에게 물려줬다. 세계 gdp 점유율(국가별)을 보더라도 1990년 14.3% 였던 것이 8.8%(2008년)로 떨어졌다.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매력있는 거점'으로 보는 투자가들은 아무도 없다.
일본경제산업성이 미국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2007년도 연구개발 및 지역총괄 부분에서 선두를 달렸던 일본이 불과 2년후 제조, 물류, 금융 등을 포함한 7개 부문에서 중국에게 1위 자리를 물려준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국제회계사무소 kpmg는 지난 3월 전세계 주요국가에서 '사업을 위한 코스트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나라'로 일본을 뽑기도 했다.
국제경쟁력 순위도 크게 하락했다. 일본의 국제경쟁력은 90년 1위였던 것이 09년 17위까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항공화물취급 분야에서 나리타공항은 4위(2000년)에서 8위로, 항만 인프라에서 10위(94년)를 차지했던 요코하마 시가 29위까지 떨어졌다.
일본우선(日本郵船)의 미야하라 고지 회장은 "일본이 침몰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에 따르면 "콘테이너 선적량에서 일본 점유율은 10년전의 절반인 3%에 불과하다"며 "기항 시의 비용이 높은 등 거래하기 힘든 나라에 외국선박이 들어올 리가 있느냐"라고 반문한다.
고도경제성장을 겪어온 일본은 앞으로도 그 우위가 계속될 것이라 생각해 왔다. 1억명에 달하는 내수시장과 뛰어난 기술력, 근면한 국민성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비교대상이 없으면 안된다.
니혼게이자이는 "일본내에서만 있으면 이 미덕들이 어떻게 저하돼 가는지 눈치조차 못 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은 세계에서 외면당하고 있으며 일본인, 기업들도 세계속에 진출하겠다는 의욕이 없다"고 비판한다.
자국 시장에 안도하지 마라
매년 연말에 개최되는, 그 해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집합하는 nhk 홍백가합전에 단골로 출연하는 'boa'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김영민 사장의 말이다.
"저희는 그녀에게 일본, 영국, 중국어를 특훈시켰어요. 왜냐면 한국 시장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시장을 노린다면 '한국 스펙'으로는 무리가 있다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음악산업은 일본이 더 발달되어 있고 일본시장은 정말 거대합니다. 일본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충분히 비지니스를 완결시킬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모두가 일본시장 안에 꽁꽁 묶여 있다는 뜻이 된다. 한국의 '한류'처럼 일본은 밖으로 내세울 만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발상 자체가 국내시장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초 유럽연합(eu)의 한 인사는 베트남과 싱가폴을 방문해 자유무역협정(fta)의 교섭에 착수했다. 자국 농업보호를 이유로 "유럽시장보다 더 폐쇄적"(벨기에 레테름 총리)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는 일본은 eu의 아시아 fta 교섭에서도 후순위 취급을 받고 있다.
유럽뿐만이 아니다. 혈맹이라고 까지 불리웠던 미국도 미일간의 자유화 교섭에서 다국간 환태평양 전략적 경제 파트너쉽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폐쇄와 축소라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일본을 매력적이라 느끼는 국가가 얼마나 있을까. 재무성 관료를 지낸 교텐 도요 전 재무관은 이 신문의 취재에 이렇게 답한다.
"경제보호, 안전보호로 포장된 일본의 세계적인 존재감 저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한번 앞을 향해 달릴 것인지, 아니면 이 정도로 만족하고 끝낼 것인지 우리 일본인들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 차기회장이 유력한 스미토모 화학의 요네쿠라 히로마사 회장은 "2010년도 중기(中期)경영계획을 통해 처음으로 해외매출 50%를 넘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는 대기업들도 일본 밖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밖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존재감을 잃는다"라고 말한다.
이 신문은 "메이지 개항 이래 해외의 좋은 점을 배우고 끊임없이 성장을 계속해 온 일본이 어느샌가 문을 닫아 버렸다"면서 "이제 세계 속으로 진출해 그 안에서 생존해 나가는 '새로운 개국 모드' 스위치를 넣을 때가 됐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