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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전 총리 별세, 향년 101세

전후 일본 정치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나카소네 야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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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호 기자
기사입력 2019/11/30 [16:26]

전후 일본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일본 총리가 29일 아침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만 101세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릴 수 있으나 일본 전후 정치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1918년 군마 현 출생으로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구 내무성에 들어가 전쟁 발발 후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해군주계소좌(소령급)로 군생활을 마쳤고, 1947년에는 정치인으로서 데뷔했다. 당시 구 군무 3구에 중의원으로 첫 당선돼 은퇴할 때까지 전후 최다인 20번 당선됐다. 과학기술, 운수, 방위, 통산, 행정관리 등 각 성청의 장관을 맡은 바 있고, 자민당 간사장, 총무회장도 지냈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그는 1954년 일본의 첫 원자력 예산도입을 주도하는 등 전후 일본의 원전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1966년 자민당에서 나카소네 파를 결성, 소수파벌이면서도 뛰어난 정무감각으로 다른 자민당내 파벌과 합종연횡의 정치를 펼쳤고,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큰 정치력을 행사했다. 1982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베 신타로, 나카가와 이치로 등 유력 후보를 누르고 제71대 총리에 취임했다.

 

나카소네 내각에 대한 다나카 전 총리의 영향이 커 '다나카 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이러한 밀월관계는 다나카 전 총리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6년에는 중참 양원 동시선거에 돌입해 300의석을 넘는 압승으로 총재 임기 연장을 달성했고, 전후 5번째 임기가 긴 정권이 됐다. 나카소네는 후계 총재로 다케시타 노보루를 지명한 뒤 퇴진했다. 그는 이후에도 정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쿠르트사가 정재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넨 '리쿠르트 사건'(1988) 당시 측근들이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고, 이 때문에 나카소네 본인이 국회에서 증인 심문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자민당을 탈당한다.  

 

3년 뒤인 1991년 복당한 뒤에는 각국 지도자와 회담하며 의원 외교를 전개했다. 소선구제 도입 뒤에는 당 비례 1위로 당선됐다. 2003년, 의원 정년을 만들고자 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은퇴 권고를 받아 공천을 받지 못하고 정계를 떠났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의원 은퇴압박을 받았을 때는 "정치 테러"라며 크게 분노하기도 했다. 당시 나이 만 85세였다.

 

대표적 정책 '공사 민영화'

 

나카소네 전 총리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 노선의 정책을 펼쳤다. 정가, 언론가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은 나카소네 전 총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통신, 철도, 담배공사 민영화다. 

 

그는 재임기간 중 일본전신전화공사(현 NTT), 일본전매공사(현 일본담배산업주식회사), 일본국유철도(현 JR그룹) 등 공사 3곳을 민영화했다. 나카소네 본인도 의원생활 최대의 결단을 공사 3사 민영화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만, 이같은 그의 '작은 정부' 노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 국공유지를 수없이 매각한데다, 각종 토지개발을 진행해 지가 급상승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미일 무역마찰 이후 엔고를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를 맺기도 했다(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이후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고 곧 지가가 폭락해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를 겪게 된다. 

 

이 때문에 일본경제의 장기침체의 책임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도 벗어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나카소네 전 총리 본인도 이를 다소 인정하는 말을 했다. 이러한 책임론에 대해 후대의 잘못된 금리정책을 비판하면서도 "그런 씨앗을 만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아사히 인터뷰)"고 밝혔다.

 

전후 일본 외교에서도 '존재감' 

 

일본에서 나카소네의 외교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레이건 대통령과의 우호적 관계다. 동서냉전 분위기 속에서 서방진영의 일원이라는 점을 선명히하며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서로를 '론', '야스'라고 편하게 호칭할 정도로 관계를 쌓았다. 이들의 관계는 일본 정가, 언론가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 레이건 대통령과 나카소네 전 총리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우호관계를 과시하고자 "우리는 서로의 이름(신조, 도널드)을 부르는 (절친한) 사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나카소네-레이건의 사례를 의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재임 중이던 1986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첫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현 미일관계의 토대가 바로 레이건 대통령과 나카소네 전 총리의 우호관계였다"

 

그는 "미일 동맹의 기본은 군사동맹으로 협상관계는 아니다. 그 본질을 알고 미국이 세계전략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일본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시켰다. 그 관계가 그 이후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적극적으로 대미협력강화를 도모했다. 미국 전략방위구상(SDI)을 위한 연구 참가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방위비도 국민총생산(GNP) 대비 1%를 돌파했다.

 

한국통이자 첫 야스쿠니 참배 총리

 

일본 보수계의 대표격 정치가였던 그는 1985년 8월 15일, 전후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그간 사적으로만 방문하던 그는 이날 총리 직함으로 공식참배했다.

 

평화헌법 개정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100년 인생의 소원은 개헌이었다. 젊을 때부터 그는 개헌을 주장했다. 자민당 창당 50년 기념식 때는 자민당이 내놓은 헌법 초안을 보고 "잘 만들었다"며 기쁨을 나타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외교에 있어서 이념이나 자존심보다는 실리나 국익을 더욱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전후 첫 일본 총리에 의한 야스쿠니 참배이긴 했으나 중국의 반발 이후 중단했다. 중국과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 분사에도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일본 정계의 손꼽히는 한국통이기도 하다. 1983년도에 전후 총리로서 처음으로 방한했을 때 전두환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가요곡 '노랜색 셔츠의 사나이'를 한국어로 부른 에피소드나 당시 인사말의 3분의 1을 한국어로 말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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