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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2)

호쿠세이 대학에서 우에무라 기자와의 운명적인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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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
기사입력 2017/03/14 [19:36]

첫 연재를 마치고서 감회가 새롭다. 언제나 새로운 일본과 만날 때마다 느끼는 특별한 감정, 생각들을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JPNEWS를 통해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공간과 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에무라 선생님과의 만남은 나에게 자신이 자라온 땅과 환경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동아시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볼 동기부여를 안겨 주었다. 민족에 대해, 국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가감없이 솔직하게 그 사고의 과정들을 JPNEWS 독자들에게 연재를 통해 이야기해나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연재분에서는 우에무라 선생님과 만나기 전의 나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어긋난 부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연재는 분명히 우에무라 선생님과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이지만, 선생님과도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2014년 7월 일본 효고현(兵庫県)의 고베(神戸)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아주 따가웠다. 하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병풍처럼 도시를 감싸는 롯코산(六甲山) 때문인지 공기만큼은 매우 산뜻했다.


나는 가톨릭대학교와 자매결연교인 고베의 한 여자 대학교에서 2주간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당시 군대에서 갓 돌아온 복학생 신분으로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더 활기가 있었고, 준비와 계획없이도 무엇인가에 도전할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정력적으로 대학생활을 했고, 그 연장선에서 학교의 지원을 받아 외국에 갈 귀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타의 단기 국제교류 프로그램이 그러하듯 내가 참가한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은 ‘문화교류’였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 학생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일본 대학생들과 처음 만났을 때, 걱정했던 것만큼 가치관이나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고, 금세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특히  우리 유학생에게  도우미 역할로 일본인 학생이 한 명씩 배정되었는데, 운 좋게도 내 짝꿍은 한국 드라마에 아주 관심이 많은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아야코, 나이는 20살, 조용하고 배려심 많은 아이였지만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해 이따금 짧은 일본어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오곤 했다. 그때마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나갔다. 대화가 끊이질 않았고 가끔 언어의 장벽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마지막 주말, 그녀는 고베를 안내해준다며 고베의 하버랜드, 산노미야(三宮)의 차이나타운 등 나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가주었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도중 저녁으로 비교적 값이 싼 유부초밥과 메밀국수를 먹고서 근처 신사를 지날 때였다.

 

아야코가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강상(さん)은 왜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거야?”
“일본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일본 입장에서 역사를 알고 싶어서.”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자 아야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은 나쁘지 않아.”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치원 시절의 기억 1
“일러라 일러라 일본 놈 일본에 가서일러라~”
내가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동네 아이들과 유치원에서 장난치면서 놀 때 쓰던 노랫말이었다. 주로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아이에게 쓰던 표현이었다.

 

유치원 시절의 기억 2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놈들은 지독한 놈들이고, 북한놈들은 더 지독한 놈들’이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셨다.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땅을 빼앗겨 화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빨치산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뻔한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미용실에는 항상 만화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만화책은 다양한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에는 ‘드래곤 볼’을 비롯한 일본의 만화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미용실이 내가 유일하게 일본의 만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모님은 자극적이고 외설스럽다며 일본의 문화를 좋지 못한 것으로 얘기하며 금지하셨지만 그럴 수록 일본만화는 재미있었다.

내가 일본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서 일본을 접하게 되었다.


나의 중학생 시절 즉 2000년대 초반까지는 문민정부의 4차례에 걸친 ‘일본 문화개방 정책’이 시행되면서, 한국이 양지(陽地)에서도 서서히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9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또래 아이들은 아무래도 어렸을 적부터 많은 일본 문화 콘텐츠를 접하면서 자라왔다.


하지만 일본과 오랫동안 교류하지 않았던 탓인지 문화개방 초창기에는 ‘왜색적인 것’에 대해 막연히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이 마치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비치기도 한 모양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어른들의 영향 때문인지 일본 미디어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 일본적인 것을 좋아하거나 일본 대중문화에 우호적인 것이 왠지 좋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일본의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반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어린 나도 그 분위기에 쉽게 휩쓸려버렸다.


게다가 학창시절 역사 시간을 통해 배운 한국의 근 현대사는 일본의 침략과 수탈, 고통받는 조선 민중의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친일은 반역의 동의어 같은, 반민족과 같은 뜻으로 통했다.
‘관심은 있지만 드러내놓고 관심이 있다고는 표현할 수 없는 혹은 좋아하게 될 수 없는’ 그런 미묘한 관계가 일본과 나 사이에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야코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문화에 대한 친근감과 한일의 민족 감정의 대립이나 역사 갈등 사이에서 조금은 미묘한 심리적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금세 친해지게 된 계기는 문화를 통한 서로에 대한 친밀함과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곧 역사와 민족감정이라는 문제가 숙제처럼 남아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후 아야코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좋은 친구로 지내며 내가 관서 지역에 갈 때나 혹은 그녀가 도쿄에 올 때 가끔씩 만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 줄곧 좋은 친구로 남게 될 것이다.


아야코가 다니던 고베의 여자 대학교는 ‘고베쇼인여자대학교’로, 2014년도에 우익들의 공격으로 전 아사히 신문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 선생님의 교수 임용이 취소된 학교다. 물론 2014년 7월 당시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던 나는 당시 우에무라 선생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2개월 뒤 2014년 9월, 나는 호쿠세이대 유학생 신분으로 우에무라 선생님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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