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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샤 대학을 거쳐 시모가모 경찰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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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주 기자
기사입력 2017-02-27

올해는 윤동주가 탄생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윤동주가 사망한 날로 알려진 지난 16일, 서울시인협회(이하 시인협회) 회원들이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일본을 직접 방문했다. JP뉴스가 이들의 윤동주 찾기에 동행해봤다. <편집자 주>

 

# 둘째날

일본에 온 기쁨과 윤동주를 기리는 밤이 끝난 첫날. 둘째날인 17일 역시 첫날 만큼 아침부터 일정이 빡빡했다. 윤동주의 흔적을 찾으러 저 멀리 교토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일정은 오전 7:00부터 시작됐다. 시인협회 회원들 첫날의 여독이 풀리지 않은 채 교토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반나절만에 460km를 달려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신칸센과 비슷했지만 굳이 버스를 대절한 이유에 대해 시인협회의 민윤기 회장은 신속성 때문이란다. 교토역에 도착하더라도 30명 이상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는 이유다.

 

버스를 타고 교토를 가는 건 기자에게도 첫 도전이었다. 가는 길을 설명하자면 도쿄 수도고속도로를 거쳐 도메이 고속도로, 이세완간 자동차도로, 메이신고속도로를 달려 교토에 진입하는 일정이었다.

 

▲  교토로 가는 길, 버스 안 도시락 풍경.     © JPNews

가나가와, 시즈오카를 통과하는 구간에서는 후지산을 보는 행운도 얻었다. 햇볕이 쨍쨍하던 날씨는 시즈오카를 지나면서 비로 급격히 바뀌었다. 그 덕에 점심은 휴게소 안 버스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에키벤'이 아닌 '버스벤'이랄까. 일본에서 먹는 첫 도시락이기에 다들 싱글벙글이다. 또 끼니 해결을 위한 시간이 줄은 탓에 교토 현지 일정도 빨리 시작될 수 있었다.

 

교토에 도착한 건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 빠른 세시경. 첫 방문지인 도시샤 대학에 들렀다. 도시샤 대학은 윤동주가 1942년 9월부터 1943년 7월까지 편입학한 대학으로 캠퍼스 안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다.

 

윤동주 시비 앞에는 그의 기일(16일) 다음날인 만큼 꽃다발이 가득했다. 민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 곳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건 지난 1995년의 일이다.

 

1990년대 초부터 윤동주 시비를 세우자며 지지자들이 모였고 이러한 바람을 5년 후 도시샤 대학 측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이날 도시샤에는 시비 건립 운동을 실제 이끌었던 주역 윤동주 추모회 회장인 박희균 씨도 만나볼 수 있었다.

 

당시 지지자들은 "윤동주야말로 남북한이 모두 높게 평가하는 시인이므로 (시비를 세우면) 통일에도 큰 기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취지를 학교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민 회장은 통일이라는 큰 뜻이 있는 시비가 바로 이 윤동주 시비라고 강조했다.

 

또 이러한 취지와 의미가 잘 전달되면서 10년 뒤 만들어진 정지용 시비(2005년 건립)는 좀 수월하게 세워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 안 윤동주 시비.    © JPNews

 

시인협회 일행들과 교토 여정을 함께 한 우에무라 타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한일 교류의 좋은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윤동주의 서시의 구절을 인생 지침 중 하나로 삼을 정도로 윤동주 시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사실 윤동주가 교토에서 쓴 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난해 2월에 왔을 때에도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꽃다발 가져와 추모하고 있었다”면서 “(시인협회 회원들이) 윤동주 시비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시인협회 회원들은 윤동주를 기리는 묵념과 시낭송을 한 후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  도시샤 대학 윤동주 시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는 서울시인협회 회원들.     © JPNews

 

두 번째 찾은 곳은 시모가모 경찰서 앞이다. 1943년 윤동주가 체포돼 구금된 장소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을 가려고 교토 역에서 짐까지 부친 상태였지만 그는 고향이 아닌 이곳 시모가모 경찰서로 끌려오게 된다.

 

구금 이유는 ‘독립운동 혐의’였다. 일본 시민단체의 요구로 일본 검찰이 지난 2010년 공개한 윤동주 재판 판결문(1944년에 작성)에 따르면 당시 일본 경찰은 윤동주와 함께 체포된 지인 송몽규에게 "(1942년부터 조선인에게 적용된) 징병제도가 조선의 무장 독립에 필요한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했으며 일제가 조선어 과목을 폐지한 사실을 비판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후 윤동주는 이 곳에서 고로오키 형사에게 조사를 받고 1944년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2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런 만큼 슬픔이 서린 곳이 바로 이 시모가모 경찰서다.

 

▲ 시모가모 경찰서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서울시인협회 회원들.     © JPNews

 

주차장 앞에서 잠시 사진을 촬영한 일행들. 유자효 전 회장은 기자와 함께 걸으며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질문을 되낸다. 28세, 세상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나이의 윤동주. 가족 하나 없는 먼 타지에서 영문 모를 취조와 심문을 받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국의 가족을 안심시키려 면회 온 당숙 윤영춘에게 “곧 풀려날 것 같으니 고향에 계신 하아버지, 부모님께 걱장하지 마시라고 연락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된 채 고향땅을 밟게 된다. 아버지는 후쿠오카로 건너가 아들의 유골을 안고 모국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  서울시인협회 한상호 회원의 자작시. / 일러스트 = 이승민    © JPNews

 

이날의 마지막 여정은 윤동주의 교토 하숙집 터였다. 현재 교토 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분교 자리가 바로 윤동주의 하숙집 터인데 윤동주가 머물 당시 이 곳에는 조선 출신 유학생이 70여 명이 하숙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일행은 조형예술대학 앞 윤동주 시비에서 기념 촬영을 한 뒤 스케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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