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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로봇가전 흑역사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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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갑
기사입력 2016-07-16

“지금 몇 시지?”

막 잠에서 깨어난 야스다는 며칠을 앓았던 사람처럼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11시 5분이요. 더 주무세요.”

유가타 차림으로 머리에 수건을 말고 있는 미나가 벽에 기대어 코지마 수첩을 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여관방의 전경. 언제 시코의 객실 안까지 옮겨 진 것인가.

 

“내가 언제 여기 온 거야? 혹시 미나상이 업고 온 거야?”

“그럴 리가요. 산몬 사장님이랑 같이 부축해서 올라 온 거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평소보다 더 차가운 미나의 말투에 야스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술기운에 무엇인가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분명 본심이 아니었을 테니까.”

 

야스다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흘러 내려가며 유가타 상의가 드러났다. ‘내가 언제 옷을 갈아 입었지?’ 그제야 야스다는 화들짝 놀라 미나에게 소리쳤다.

 

“내가... 우리가 뭔 일 있었던 거 아니지?”

야스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나는 읽고 있는 수첩을 소리 나게 닫고 그를 잠시 노려 보았다. 그 눈빛의 뜻은 분명 저질, 최저였다.

 

“글쎄요. 본인이 기억나지 않는데 열심히 설명해봤자 이쪽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 같네요. 혼자 곰곰이 잘 생각해보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

미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객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야스다는 그녀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에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 되어 버렸다.

 

‘뭐지. 그거.. 확실히 그거 아닌가? 아니야? 그럼 뭐지? 도대체?’

 

일층에 내려오자 산몬의 커다란 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한참을 무언가를 닦아내느라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말이다.

 

“제가 할께요.”

“아냐. 손님한테 이런 걸 시킬 순 없지.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지 그래.”

 

마루에는 무엇인가를 쏟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산몬은 아마 그 흔적마저 전부 지워 질 때까지 걸레질을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온천에서 씻고 나와서 피곤이 거의 다 풀렸어요. 그리고 구미(組)의 잘못은 조원(組員)이 책임져야죠.”

걸레를 야무지게 빼앗는 손길에 구순 노인은 민망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아깝군. 그 아까운 사사키네 명주(名酒)를 몽땅 토해 버렸으니... 야스다 녀석.”

“그래서 혼자 벌을 받고 있어요. 선배는 그게 벌인지도 모르겠지만.”

“벌?”

 

미나의 설명을 들은 산몬 헤이죠는 ‘곤란해, 곤란해’ 를 연발하며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그리고 다시금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도 이젠 이런 즐거움이 일시적일 뿐이란 것을 안다.

 

히노가 죽고, 아내가 죽고, 치에 마저 여관을 떠나면서 그 빈자리로 누군가 찾아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산몬을 비웃으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이렇게 잠시 사람들을 만나면 녀석은 썰물처럼 빠져 자리를 내어 주다가도 혼자가 되면 반드시 자기 자리를 찾아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 올 것이다. 고독(孤獨)을 산몬 헤이죠는 70년 전에 이미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70년 전인 1945년 5월. 산몬 헤이죠는 버마의 정글 안에 있었다. 전투 도중 부대에서 낙오된 산몬은 그 곳에서 홀로 석 달을 버텼다. 살아 남기 위해 동료의 시체에서 보급품을 모으고, 스스로 야생 동물을 사냥했다. 솜씨 좋은 여관음식에 익숙했던 그에게 짐승의 누린 살코기 맛은 자신이 홀로 떨어졌음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해주었다. 처음 일주일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미군에게 잡히면 껍질이 벗겨진 채 고문당하다 죽는 다는 이야기를 일본군 장교로부터 매일 같이 들었었다. 그러니 잡히면 반드시 자결하라고.

 

그러나 산몬은 고문 받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두려웠다. 그래서 악몽을 꾸면 그는 고문 대신 무딘 칼로 할복을 하거나, 절벽 위에서 날카로운 바위들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악몽은 고스란히 현실에까지 연결되었다. 산몬은 더 이상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절벽 근처에 다가 가지 못했고, 날붙이들을 모두 땅에 묻은 채 직접 만든 돌칼로 사냥을 했다. 산몬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잖아? 어쩌면 부대에서 낙오된 것이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라. 이대로 전쟁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자. 아무 일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온갖 잡념을 억눌렀다.

 

그렇다고 정글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독버섯을 잘못 끓여 먹고 삼일 동안 환각 증세와 열병을 앓다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원주민이 설치한 덫에 걸려 발목이 잘릴 뻔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죽음을 생각했고, 자다가도 질식 직전까지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악몽에 선잠을 자는 날이 많았다. 그는 문필가 되고 싶었지만 이런 전쟁을 경험한 이상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어버렸다. 그리고 매일 검은 강물에 더러운 얼굴을 비추며 되뇌었다.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산몬이 혼잣말을 하는 버릇은 바로 이때부터 생겼다. 혼잣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누군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삼개월 후 영국군이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산몬은 흡사 진흙탕에 빠진 원숭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소속부대는 물론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영국군 선임 하사는 반쯤 정신이 나간 그를 맨손으로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굳센 팔에 붙들려 밧줄에 결박당하는 동안 산몬은 영국군의 우뚝 솟은 코를 보며 중얼 거렸다.

 

“네 말이 맞아. 결국 텐구(天狗, 코가 큰 일본의 요괴)가 왔어.”

산몬이 무엇인가 중얼 거리는 바람에 영국군은 한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정글은 아무 런 인기척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만약 영국군이 수색 도중 바나나를 굽는 연기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면, 산몬은 그대로 정글에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괌과 필리핀의 정글에서 30여년을 숨어산 요코이 쇼이치(横井庄一)나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처럼.

 

송환 포로들 사이에 섞여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무라. 시코. 돌아가야 할 집. 힘겹게 돌아온 고향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기억하던 공기와는 달랐다. 그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아내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을까.

 

미나는 걸레질을 멈추고 잠시 차에 다녀왔다. 돌아온 그녀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도쿠리(徳利, 위가 잘록한 자기 술병)에 담긴 매실주와 패트병에 든 푸른색의 세제였다. 걸레에 액체를 조금 뿌린 미나는 그것을 바닥에 대고 박박 문질렀다. 야스다가 토했던 자국이 금세 사라졌다.

 

“신기하군. 그게 뭔가?”

“아. 이거 로봇 청소기 충진물이예요. 바닥 물청소할 때 넣어주는 거. 그런데, 사장님도 로봇청소기 사셨었죠?”

 

산몬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지?

 

“사라졌어. 아마도 누가 훔쳐갔거나 스스로 나간 모양이야.”

미나는 산몬의 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로봇 청소기가 열린 문으로 나가 사라지는 건 도시의 전설일 뿐, HIKARI-RAI 같은 최신 기종은 처음 스캔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장된 GPS를 일부러 찾아 부수거나 방향 제어 장치가 망가지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사사키 후미에의 사부로처럼 사용자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미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너무 피곤했으므로.

 

“이거 사사키 후미에씨가 시코 사장님랑 같이 나눠 마시라고 해서 받아 온 건데 지금 드실래요?”

미나가 술병을 흔들자 산몬이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간단한 안주를 내 오겠네. 2층 서재 방에 먼저 가서 기다리게. 야스다 녀석도 자고 있지 않으면 부르던가.”

 

자신의 옷과 머리에 먹은 것을 게워내던 야스다를 떠올린 미나는 진절머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야스다는 오늘 좀 더 쉬어야 한다.

 

“그냥 둘이 마셔요.”

산몬이 부엌으로 간 사이 미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 방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제일 먼저 그녀를 자극한 것은 후각이었다. 책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과정에서 풍기는 단내와 질 좋은 엽궐련(葉卷煙)의 냄새, 차와 원두의 향기, 그리고 이 곳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한 노인의 채취가 방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

 

작은 방안의 한 켠은 커다란 책장 가득 이름 모를 책들이, 정원이 내려 다 보이는 창가에는 커다란 집무용 책상이 고즈넉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앉으면 건너편 벽 상단에 역대 산몬가를 이끌어온 당주(当主)들의 사진들이 보였다. 산몬 헤이죠의 사진으로 보이는 것은 아직 붙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집무용 책상의 왼편으로 작은 부쯔단(仏壇,불단)이 있었다. 시코를 배경으로 한 기모노 차림의 한 여성의 흑백 사진, 그리고 심약한 얼굴의 소년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사노스케(佐野透け)에 대한 이야기는 야스다에게 들었지? 말이 많은 녀석이니까.”

산몬이 어느새 왔는지 쟁반을 들고 문가에 서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미나는 그가 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소년이 그 히노 사노스케...’

그녀의 상상 속 히노 사노스케는 짧은 머리를 젤로 세운 구리빛 피부의 눈썹이 진한 쾌남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실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녀는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식기 전에 먹자구.”

메밀가루를 묻혀 하얗게 튀긴 민물메기 튀김이 기름 종이가 깔린 나무 그릇에 수북이 올라 와 있었다. 찍어 먹을 쯔유에는 약간 거칠게 간 무와 송송 썬 파가 함께 들어가 있었다. 별 특징 없는 새 하얀 잔은 연두색 메실 주를 담으니 빛이 아주 좋았다. 히노의 사진을 보지 않았다면 벌써 젓가락이 가도 몇 번을 갈 술상이었다.

 

“먼저 선배에게 인사를 해도 될까요?”

산몬은 안절부절 못하는 미나가 귀엽게 느껴졌다. 예전부터 히노는 제법 친구가 많았다. 어딜 가도 혼자 있고 싶어 하지 않은 성격 탓에 항상 주변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산몬과는 달리 그때의 히노는 아직 뭔가 스스로 얻어내고자 하는 집념과 힘이 있었다. 이십년 가까이 시코료칸에서 사환으로 살아왔던 히노가 불현듯 도쿄로 떠난다고 선언할 때도 산몬은 기꺼이 히노의 등을 떠밀었다. 녀석을 믿었으니까.

 

“에도(江戸)로, 도쿄(東京)로 떠나. 우리 걱정은 말고.”

어설프게 합장을 올리는 미나의 뒷모습을 보며 산몬은 사사키의 우메슈(梅酒,메실주)를 한입 털어 넣었다. 미나는 잠시 기도를 올린 뒤에도 여전히 히노의 영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히노에 대해서 궁금한가?”

산몬의 말에 미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계속- 내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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