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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로봇가전 흑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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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갑
기사입력 2016-06-11

<편집자 주 : 지난 주말부터 일본을 무대로 한 신내기 작가 김명갑의 단편 혹은 장편 소설을 연이어 연재합니다. '문학'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이 가득한 신예 작가 김명갑은, 일본생활에서의 소소한 경험을 배경으로 매주 주말에 소설을 발표합니다. 신인이기에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백도화지처럼 그렇게 한회씩 '소설'이라는 형태로 '일본사람' 이야기를 그려 나갈 예정입니다. 김작가의 시선을 통해 일본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 지,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 노래가 참 좋더라. 사카이 이즈미의「Goodbye my loneliness」. 미나상도 이 노래 알아?”

 

후쿠오카의 지방 국도를 달리는 작은 벤. 세 시간이 넘는 침묵을 깬 것은 역시 야스다 쪽이었다. 박미나는 야스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스다가 느끼기에 미나의 지금 표정은 ‘지금 내가 보여?’라고 묻는 귀신같았다.

 

“알아요. Zard.”

그 말을 끝으로 미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야스다는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싶어 식은 땀이 흘렀다. 그는 문득 부장으로부터 “개발부에 있던 어떤 괴상한 녀석이 곧 네 밑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란 말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 괴상한 녀석이 여자라는 걸, 그것도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쁜 여자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전에는 개발부에 있었다고 했지?”

“개발부 1년. 그 전에는 총무부에서 1년 있었구요. 여기도 좋던 싫던 1년을 보내야겠죠.”

“올해가 그럼 마지막이겠군. 혹시 어디로 갈지 정했어?”

 

「야마토 로봇가전」에는 독특한 사규가 있다. 사원은 누구나 입사 후 첫 3년 동안은 업무처를 1년 단위로 바꾸며 일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타 부서의 일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으며, 유사시 업무 공조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3년이 지나면 사원은 누구나 원하는 부서를 지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부서의 담당자들은 신입사원들에게 업무를 충분히 숙달시키기 보다는 이런저런 신경을 많이 써주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에 바빴다.

 

혹여는 내과, 외과, 신경외과, 정신과 등을 돌며 전문의를 결정하게 되는 의국의 ‘레지던트’ 과정과 비슷해서 3년 미만의 신입사원을 ‘레지’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야스다도 신입 때는 삼년 내내 이름 대신 ‘레지’라고 불렸다. 만약 남자 신입이 들어 왔다면, 야스다도 별 생각 없이 ‘1년 간 잘 부탁한다. 레지’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했을 것이다.

 

“아직요. 선배님.”

 

야스다는 선배라는 호칭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업무적으로 사수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건 회사 내에서 많아야 3명이다. 회사 내에서 살아남는 기술, 업무적 재능을 키워준 사람들이니 업무처가 갈린 후에라도 대부분 사석에서는 ‘다나카 부장님’이니 ‘사토 계장님’처럼 직함을 부르기 보다는 레지 때처럼 ‘선배님’이라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적어도 이 회사에서 ‘선배’라는 호칭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사카이 이즈미 말이야. 가수를 하기 전에는 레이싱 모델 일을 했어.”

“.....”

“총무부랑 개발부에 있었던 게 회사 일의 전부라고 생각 하지마. 무엇이 자기 일에 적성인지는 마지막까지 모르는 거야. 나도 영업부에 와서야 막힌 것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니까. 적성이 잘 맞아서 나름 영업부 안에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고.”

“지금 그 말은 안도 부장님이랑, 야나기 차장님께 실례되는 말이 아닐까요?”

 

개발부와 총무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자 야스다도 입을 다물었다. 가끔 방문 판매를 하다 보면 미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정성스럽게 차를 내오고 정좌로 제품 설명을 들어주지만 정작 물건은 사주지는 않는 사람. 예의나 경우에 바르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정한 확고한 원칙과 특유의 고집이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이르지. 남을 설득하는게 내 직업이니까.’

 

결국 야스다는 헤더 박스에서 꼬질꼬질한 수첩을 하나 꺼냈다. 링으로 제본된 수첩은 속지가 계속 보충된 탓에 원래 두께보다 세배는 더 두꺼워져서 고무줄로 간신히 형태를 잡아 놓고 있었다.

 

“이게 뭐에요?”

“영업부의 보물. 원래는 시간이 좀 지나면 보여주려고 했지만. 미나상도 일단 ‘코지마 반( 小島 組)’의 레... 아니 루키니까 볼 자격이 있어.”

 

미나는 낡은 가죽 수첩을 건네 받았다. 겉에는 희미한 금박으로 ‘1967년 5월 2일.「야마토 가전」창립 기념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미나는 헐거워진 고무줄을 벗겨 손목에 걸고 첫 장을 넘겼다. 적어도 이것을 읽는 동안에는 저 말 많은 남자가 조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코지마 코타로. 영업부 발령 1일차’로 시작되는 글은 코지마가 만났던 수 많은 고객들의 정보와 특징들이 세로 쓰기로 아주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월별, 년별로 그 특징을 종합한 통계자료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6월에는 20,30대의 전자레인지 구매율이 높다. 결혼 시즌이 몰려 있어 그런 것으로 예상. 단카이 세대의 결혼 적령기인 요 몇 년간이 피크일 것" 등 나름 현실성 있는 분석도 있었고,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방문 판매 구매율이 높다. 이유는 아직 분석 중" 처럼 실소가 절로 나오는 문장도 있었다. 1981부터는 ‘시바타 카오루’가, 1993년부터는 ‘오다 켄이치’, 2001년 부터는 ‘마츠다 타케우치’, 그리고 2004년부터 2012년까지는 ‘히노 사노스케’가 자신들의 영업 노하우와 고객현황을 기록해오고 있었다. 아직 야스다 마모루의 것은 없었다.

 

“퇴사 하거나 승진해서 더 이상 현장에 나가지 않을 때나 코지마 수첩에 자신의 코멘트를 추가할 수 있어. 그 전까지는 각자 자기 수첩에 적어 놓는 거지. 아직도 실적이 안 나오는 달이나, 고객들을 상대하다 힘에 부치는 날이면 꺼내서 읽어. 거기에는 선배들이 나에게 해 주는 조언들이 들어있거든. ”

“그렇군요. 소중한 물건 잘 봤습니다. 선배님.”

돌려주려던 미나의 손을 야스다가 잠시 제지했다.

 

“앞으로야 어찌되었건 지금은 코지마 반이잖아? 지금은 미나상이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미나는 어떻게 보면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야스다가 개발부의 안도 선배나, 총무과 야나기 선배보다 사람 끌어 들이는 일에 더 열성적이라고 생각하며 고무줄로 수첩을 잘 봉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야스다는 심드렁하던 미나의 표정이 바뀌어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코지마 코타로 만세’ 를 작게 외쳤다.

 

“차가 아무래도 고장난 거 같아. 거의 다 왔는데.”

 

목적지인 K현을 이제 십여 분 남겨두고 벤은 그만 퍼지고 말았다. 지도를 보기 위해 갓길에 잠시 차를 정차했는데, 갑자기 시동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제가 잠시 봐도 될까요?”

“차를 볼 줄 알아?”

“조금”

 

핸드백에서 흰 장갑을 꺼내 낀 미나는 벤의 보넷을 열었다. 예상대로 베터리가 방전되어 있었다.

 

‘덥다고 에어컨을 너무 오랫동안 켜두고 있었어.’

“배터리가 나갔어요. 혹시 주변에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있나요?”

 

야스다는 코지마 수첩을 뒤져 예전에 신세를 졌던 누에무라의 전화 번호를 찾았다. 누에무라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아직 일하는 중이라 한 시간 뒤에나 도착한다는 대답이 들려 왔다. 미나를 힐끔 쳐다보니 그녀는 목에 흐르는 땀을 보디 시트로 연신 닦아 내며 보네트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가 8월의 후덥지근한 공기, 보네트 안의 열기와 뒤섞여 금세 땀으로 흥건해지고 있었다.

 

“심각하진 않아. 바쁜데 갑자기 이런 전화해서 미안해. 천천히 와도 괜찮아.”

 

야스다 역시 벌써부터 젖어오기 시작하는 자신의 셔츠 겨드랑이를 확인하며 누에무라에게 말했다.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에도 미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늘 하나 없는 이런 날씨에 한 시간 넘게 서 있으면 아마도 열사병으로 쓰러질 것이다. 그렇다고 에어컨이 꺼져 한증막처럼 되어버린 차안에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보니까 저 쪽에 버스 정류장이 있던데 거기까지 가보자고. 여기 있다간 죽겠어.”

 

미나는 기름때가 묻은 장갑을 비닐 팩에 담아 핸드백에 넣었다. 야스다는 수첩을 차 안에 두고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미나는 굳이 그것마저 들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지방 국도의 갓길을 걸었다. 평소라면 이 같은 상황에 짜증이 났겠지만 야스다는 웬일인지 지금의 불편이 싫지 않았다. 까탈스러워 보이는 미나가 정작 곤란할 때는 별말 없이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물론 이런 날씨에 타인과 감정 소모를 하며 열을 내기 싫은 탓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미나의 기분을 야스다가 알 턱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은 야스다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과 눈썰미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앉아 있어. 조금 더 올라가면 편의점도 있었던 거 같아. 음료수라도 사 올게.”

 

지갑을 꺼내 돈을 건네려는 미나의 손길을 뿌리치고 야스다는 기억 속 편의점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뭘 좋아하는 지 물어 보는 것을 깜빡 잊었다고 자책했다. 차가운 캔 커피가 좋을까? 아니야. 역시 평범하게 콜라가 좋을지도. 

 

야스다는 중학교 때 반 대표로 계주에 참가한 이후 참 오랜만에 뜀박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이 시원하게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서른 셋인 자신의 몸이 생각보다 늙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숨은 가쁘지 않았다.

 

미나는 정류장 그늘 아래 앉아 수첩을 읽으며 지난 2 년간을 되돌아 보았다. 총무과에 있을 때는 여자 사원들 사이에서 그녀는 약간 튀는 쪽이었다. 한국인 유학생 출신으로 여자 동료들보다는 오히려 한 두살 연상. 더구나 남자한테나 여자한테 살갑지 못하고 친구를 만들지도 않아 주변에서 그녀를 몹시 어려워했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어려워하면 할수록 그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자신이 마음 쓸 일도, 마음을 쓰다 다치는 일도 적었다. 그러나 총무과는 돈을 다루는 일이고 늘 신경 써야 하는 곳이 많은 부서였다. 또한 결산이 맞지 않으면 직원 전원이 퇴근을 하지 못하고 함께 돈을 맞추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어, 실은 팀 단합과 인간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부서이기도 했다. 언제 내가 실수할 지 모르고, 도움을 받을 지도 모르니 미리 그런 관계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언제 곤란을 당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여자라고 얕보이거나 한국인이라고 이유 없는 미움을 사거나, 업무에 서툰 신입 티를 내기 싫어 열심히 일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팀에서 그녀를 고립시킨 원인이 되어 있었다. 야나기 차장은 신입사원치곤 일을 잘하는 그녀가 나중에 총부과로 돌아오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숫자와 사내 정치 질로 가득한 그곳에서 요령 없는 줄타기를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탑니까? 안 탈 겁니까?”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마을 버스 한 대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열린 버스 문 틈 사이로 나이가 지긋한 버스 기사가 그녀를 내려다 보며 외치고 있었다.

 

                                                        (계속 - 내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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