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천년의 고도를 자랑하는 교토.
이 교토 한켠에는 '미미즈카(耳塚)'라고 하는 귀무덤이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존재조차 잘 모르는 이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코가 묻힌 곳이다.
귀무덤이라 불리는 조선 사람들의 <코무덤>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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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1592년부터 16만의 대군을 보내 일으킨 전쟁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합쳐 7년을 끌었고, 조선에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낳았다. 일본어로는 분로쿠(文禄), 게이초(慶長)의 역(役)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충성경쟁을 벌이던 휘하 다이묘들은 전쟁의 증거로서 조선의 병사 및 백성들까지 살육한뒤 코를 베어서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후에 코무덤이라는 명칭이 듣기 거북하다 하여 이름이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이 일본인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일 정도로 유명한 임진왜란. 그러나 침략의 당사자인 일본에서는 '왜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누가 희생당했는지'를 학교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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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총 4년에 걸쳐 6,000만엔이라는 예산으로 일본, 한국, 북한, 중국까지 임진왜란의 격전지를 따라 현지 로케이션을 하면서 촬영한 장편 기록 영화 <월하(月下)의 침략자>를 올해 5월 완성했다. 그 상영회가 지난 8월 27일, 28일 이틀간 도쿄 신바시 야쿠르트홀에서 열렸다.
영화는 2시간 48분으로 제1장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생부터 전쟁의 경과, 한국・북한 역사학자의 견해, 의병장 후손 인터뷰 , 강화회담 등이 담긴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 주요 다이묘들의 조선 침략시 루트를 시작으로 임진왜란의 분수령이 되었던 평양성 싸움, 막대한 피해를 낸 남원성 싸움 및 사명대사의 활약, 논개의 충절 등 단순히 일본측 시각 뿐 아니라 한국측 시각을 풍부하게 담았으며, 임진왜란이 침략전쟁이었음을 명확히 했다.
특히 곽재우, 고경명 등 의병장, 유학자 강항, 항왜 사야카(김충선), 명량해전때 전사한 왜군들의 무덤을 뜻하는 왜덕산까지 취재, 일본인들이 잘 모르는 임진왜란 전 과정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을 한 것이 특징이다. 물론 중국 자금성까지 가서 명나라의 입장까지 카메라에 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는 수많은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7년간의 전쟁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당시 조선 침략후 살육한 조선백성들의 코 개수를 기록해 다이묘끼리 거래한 종이부터, 조선에서 납치해간 도공들의 후손(심수관 및 아리타야키-이훈평)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영상에 남겼다. 납치문제로 민감한 북일간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평양으로 건너가 북한이 바라보는 임진왜란에 대한 견해를 직접 물어보고, 사명대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묘향산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야말로 임진왜란에 관한 한 남,북,중국,일본 동아시아 4개국의 모든 것을 담은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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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news는 28일 오후 상영회장을 직접 찾아 영화를 본 뒤, 보고 난 사람들의 감상, 영화를 제작한 마에다 감독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 "이 정도까지 잔인한 줄 몰랐다"
상영회를 찾은 사람은 대부분 노년층이 많았으나 젊은 층, 학생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좌석은 1층 홀을 거의 꽉 메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다음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물어본 관객의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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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재일동포 (게이오 중학교 보통부 2학년)
- 보고 난 감상은?
내용이 조금 어려웠지만, 일본의 악행을 알게 되었고, 조선인으로서 열심히 싸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병력수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음에도 이순신 장군도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 이 상영회를 어떻게 알고 왔나
학교에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에 대해 레포트를 쓸 생각인데, 가정교사를 하시는 분이 추천해서 보러오게 되었다.
최성희(재일동포 3세. 한국근대사 전공 대학원생)
-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영웅이고,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시점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이 충무공이라든가 등등. 그러나 임진왜란은 과거의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현재 한일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기록영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2세의 남성 관람객
- 어떻게 이 상영회를 알고 왔나
친구 소개로 왔다.
- 보고 느낀 것은?
새삼스레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정도로 잔인한 줄은 몰랐다. 그 희생자수하며. 또 조선이 전쟁에 얼마나 무방비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 귀무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교토에 있는 미미즈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외 지역에도 있는 줄 몰랐다.
미츠바라 에이코(82, 가와사키 거주)
- 정말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미미즈카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구체적으로는 몰랐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는 타이코사마(太閤様)라 불리면서 칭송을 받고 있지만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습니다. .
감독님의 작업이 대단하고, 이런 영화를 보게해줘서 감사드립니다.
<마에다 켄지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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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영화를 만든 계기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원래 시대 배경 즉 고대사나 중세사에 흥미가 없었습니다. 다만, 도래인들이 세운 신사에 흥미가 많았습니다. 특히 마츠리, 민중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보니 예전부터 있었던 예능인들의 차별 문제도 다루고, 태평양전쟁시 강제연행당했던 한국인들도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 기록영화는 7년간 126명의 증언을 받아서 3년반에 걸쳐 2000년에 영화로 만들었습니다(백만명의 신세타령). 그리고 나서 이번 <월하의 침략자>를 만들게 되었는데, 계기는 임진왜란의 배경에 대해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전국시대 등 전기물(戦記物) 등을 좋아하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임진왜란을 일본의 시각이 아닌 한국, 중국의 시각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본 임진왜란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자 한국에 갔습니다.
그때 서울대 명예교수이신 이도형선생께서 '이것도 한번 봐라,' '저것도 한번 봐라' 하시면서 여러가지 자료를 많이 소개해주셨고, 그것을 바탕으로 번역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현지 로케도 했습니다.
- 귀무덤에 초점을 두고 다룬 이유가 있나요?
일본에서는 미미즈카에 대해 전혀 거의 교육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것을 먼저 알리고 싶었습니다. 일본은 과거의 잘못한 역사, 여기서 도망치면 안됩니다. 한국과 일본, 나아가서 아시아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일본의 부끄러운 부분도 알려야합니다.
일본의 역사는 과거를 지우고 있습니다 특히 귀무덤은 너무나 사라져버린 역사입니다.
적은 사람이 보더라도 꼭 알리고 싶었습니다. 특히 히데요시는 메이지유신 이후 지나치게 이용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잡았던 에도시대에 히데요시를 언급한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히데요시는 신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영웅시화되면서 조선 병탄의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영웅시하는 흐름이 이어져 전후(戦後)에는 밑바닥에서 일본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간 히데요시를 샐러리맨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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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큰 배급사가 배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손에 의해 상영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시민들의 자발적인 입소문으로, 스스로 보고 깨닫기를 바라는 거죠.
앞으로 나라,교토,히로시마 등 일본 각지에서 상영을 할 예정에 있고, 구체적으로 히로시마에서는 9월부터 10월까지 1개월 정도 상영 예정에 있습니다. 교토는 1월 16일부터 상영될 예정입니다.또한 지역별로 작가 등 문화인들을 중심으로 상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니가타, 오사카, 미에현 등에서.
그렇게 배급사의 힘이 아니라 시민들의 힘으로 1년반 걸려서 느리지만 오래 상영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보고 난 분들이 '한번 더 보고 싶다.' 'dvd가 시판되면 사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시민들의 힘으로 상영 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 영화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더 했으면 좋겠고, 현재 일본에서는 일방적으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이야기만 하고 있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죠. 임진왜란을 보면서 그런 납치에 대한 것도 이 영화를 보고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더욱 자발적인 움직임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 임진왜란이 일본에게 미친 영향은? 당시 조선은 전란으로 엄청나게 피폐해졌습니다만,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실감을 할 수 없을 수도 있을텐데요.
임진왜란은 기본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토요토미가 침략을 명할 때 주요 다이묘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나 센노리큐 등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일본이라고 피해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당시 서일본쪽 마을은 일반 백성들은 모조리 배에 노를 젓는 사람으로 전쟁에 끌려가서 아버지가 없는 모자가정이 태반이었습니다. 일본의 일반백성도 피해자입니다.
그러나...한국을 보세요. 대장금을 보셔도 알겠지만, 대장금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음식문화만 하더라도 수십가지가 있고, 화려한 왕조문화가 꽃피고 있었습니다. 장금이를 볼 때마다 느끼는 데 대단한 거죠. 일본은 그런 춤의 나라의 빈틈을 노려서 16만이라는 대군을 보내서 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하들, 다이묘들에게 충성경쟁을 시켜서 코를 베어오게 한 것입니다. 사람 코를 어떻게 베는 줄 알아요? 코만 싹 베는 게 아니에요. 윗 입술부터 긁듯이 베어냅니다. 산 사람도 아이들도 무자비하게 말이죠.
저는 그래서 그런 전쟁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 무의미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두번 다시 그런 사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고요한 강물에 작은 돌을 던지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겠다 싶은 겁니다.
사실, 이런 영화는 상당히 용기가 필요합니다.
-네. 영화를 만드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습니까
신들의 이력서(神々の履歴書)를 찍을때였습니다. 1986년만 하더라도 서울에 가서 영화를 찍으려고 하면 '왜놈이 왜 한국에 왔냐'하면서 맥주병으로 맞기도 하고 힘들었습니다. 요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이번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죠.
아마 제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도 받고, 마에다라면 괜찮다, 봐줘라 하는 이미지가 한국측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일본에는 일본인이 없습니다. 원래 일본에 있는 아이누, 코비토, 하야토 등 일본의 원시부족이 있었지만 660년 백제가 망하고 나서 도래인들이 와서 다 외곽으로 몰아내고,본격적으로 야마토(大和)가 세워집니다. 사실 백제가 망할 때 이미 백제는 껍데기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막부시대 최고 권력자를 뜻하는 말 쇼군. 이 쇼군의 정식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으로, 즉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라는 뜻이다. 일본역사는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혼슈 내부의 영역를 확장해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확장은 메이지 신정부 수립 후 더욱 확장되어, 사츠마번의 식민지였던 류큐왕국은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고 아이누가 살고 있던 홋카이도에는 본격적인 혼슈 거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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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언제였습니까
일본은 여러나라의 문화가 고이는 곳입니다. 한국,중국,가야,오키나와,북방민족의 모든 것이요.
저는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250편 이상, 일본 전국의 마츠리(일본축제)를 비디오로 찍어왔습니다. 그런데, 아오모리에 가니까 신라 신사가 있었습니다. 왜 이곳에 신라 신사가 있을까. 카가와현을 가도 신라신사가 있고,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도쿄 기요세시 근처에는 코마신사(고려)가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 각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삼국문화가 있습니다.
한국어로 '우리나라'에서 유래된 '나라(奈良)'를 가보면 아스카 지역이 있습니다. 이곳은 거의 백제의 집적체입니다. 덴무 천황도 그렇고. 그런데 조금 떨어진 곳에는 또 고구려 도래인들의 지역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저는 '일본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반도와 관련된 기록영화를 찍고 싶었습니다만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의 이력서(神々の履歴書)를 찍고, tv에서 의뢰를 받아 오키나와전을 찍고, 여러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이 생겼습니다.
이번 영화는 그런 저의 여러가지 작업이 큰 흐름을 타고 정리된 형태로 나온 것입니다.
- 한국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 특히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측면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만, 한국에서도 상영 계획은 있으신지요
지금까지 제가 만든 기록영화는 kbs에서 전부 구매해주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아직 이야기가 없지만요.
아울러,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한국의 한류 등 뛰어난 컨텐츠가 많지만, <다큐멘터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보다 교육적인 다큐멘터리를 한국에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향후 작품 계획은 있으신지요
예정입니다만, 얼마전 강릉의 단오제를 보고 왔습니다. 거기에 무당인 '빈순애'씨가 있습니다.
무당은 사람이면서도 인간 이상의 정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당이 동아시아 전체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물질 문명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 무당의 마음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받을 것인가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로케이션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살면서, 지역과 밀착해서 동아시아가 하나가 되는 그럼 마음을 찍고 싶습니다.
- 손님맞이 등 바쁘신데 이렇게 인터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이런 한일간의 역사를 그대 같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고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유교의 나라입니다. 유교로 안좋은 것도 있지만 유교의 장점도 아주 많습니다. 한국은 그런 풍요로운 부분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분들과 만나는 것은 제게도 즐거운 일입니다.
<끝>
마에다 켄지(前田憲二)
1935년 출생. 영화감독.
1960년대부터 일본 각지나 중국, 한반도의 축제나 예능을 쫓아다니며 그 내용을 기록한 tv, 영화작품이 250편 이상. 대표작으로 <오키나와전의 그림, 생명이야말로 보물 おきなわ戦の図命どぅ宝(1984)> <신들의 이력서(1988)><토속의 난성 土俗の乱声(1991)><백만명의 신세타령 百万人の身世打鈴(2000)> 등 다수.
2001년 10월 한국정부로부터 왕관문화훈장 수상.
현재 가쿠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 프로젝트 운영 프로젝트 운영위원, npo hanulhouse 대표이사.
향후 <월하의 침략자> 상영정보는 아래 블로그 참조
http://blogs.yahoo.co.jp/hanulhouse5996
◆ 그 외 상영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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