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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주세요'가 '사랑 주세요'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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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철 기자
기사입력 2012-03-03

일본에서 맥도날드는 단순히 햄버거나 파는 패스트푸드 가게라기보다 일본 사람들의 휴식처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맥도날드에 앉아 있으면 학생들은 물론이고 샐러리맨부터 노인들까지 실로 다양한 연령대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맥도날드는 음식 체인점 부동의 1위답게 일본 최대의 점포 수를 가지고 있어 이용이 편리하다. 도쿄의 어떤 역에서 내려도 어김없이 근처에는 맥도날드가 있다. 2011년도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 전국 맥도날드 점포 수는 무려 3,300여 개. 이 중 445개의 점포가 도쿄에 집중돼 있다.

또한, 맥도날드는 저렴한 메뉴가 다양하게 있다. 햄버거 자체만 보면 그렇게까지 싸다는 느낌은 없지만(세트 가격 기준 500~800엔), 아침메뉴가 저렴하고 100엔대 메뉴가 많아 많은 이들이 간단한 요기와 함께 휴식처로 이용하고 있다.



 

유학생들에게도 맥도날드는 천금 같은 휴식처다. 한여름의 살인적인 무더위 날씨에는 단돈 120엔짜리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고 몇 시간이고 들어가 쉴 수 있다.
 
특히 시험 때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에 앉아 밤을 새우며 공부한 기억은 유학생이라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겨울도 마찬가지. 집에서 비싼 난방비 쓸 필요 없이 140엔 하는 핫커피를 시켜 차가운 몸을 데울 수 있다.

나 역시 어학 초년병 시절부터 맥도날드의 커피를 자주 이용했다. 한 푼이 궁한 유학생 시절이다 보니 일반 커피 전문점은 엄두도 안 날 때다. 100엔대 커피 값으로 몇 시간을 있을 수 있는 곳은 일본에서 흔하지 않다.
 
운만 좋으면 조용한 분위기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맥도날드는 대체로 시끄럽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습격(?)하는 시간대는 방문을 자제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

100엔 역시 크게 느껴지던 나는 ‘긴켄숍(金券ショップ)’을 이용해 50% 커피 할인권을 사서 맥도날드를 도서관처럼 이용했다. 긴켄숍이란, 영화표나 승차권 등 다양한 티켓을 매입하고 싸게 판매하는 곳이다.

여유 없던 유학생 시절, 싼값에 요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점인 동시에 학습의 장을 제공했던 고마운 맥도날드였지만, 매번 갈 때마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점원에게 커피를 주문할 때 한번에 알아듣는 점원이 거의 없었던 것. 점원이 못 알아듣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의 너무나도 후진 발음 때문이다.

‘커피’의 일본식 발음을 한글 표기법에 맞게 쓰면 '코히'가 된다. 그러나 맥도날드에 가서 '코히'라고 아무리 외쳐 봤자 커피는 나오지 않는다. 한글 표기법상 일본어의 장음이 한글에서는 무시되기 때문이다. 일본어에서 장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자칫하면, '사랑'을 뜻하는 일본어 '코이'로 들려 '커피' 주문이 아닌 점원에게 사랑을 구애하는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커피를 발음 나는 대로 표기하면 ‘코우히이’가 된다. 그러나 발음대로 또박또박 ‘코’ ‘우’ ‘히’ ‘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코—‘, ‘히—‘라고 길게 늘여 발음해야 ‘커피’라는 단어가 완성된다. 그러나 단어가 완성된 것과 일본인이 알아듣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기까지 1단계 장음 구사법이라면, 2단계인 인토네이션(intonation, 억양)을 가미해야 뜻이 전달된다. 일본어의 인토네이션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음절을 중심으로 높낮이가 저에서 고로 변하여 끝나는 것, 고에서 저로 변하여 끝나는 것, 저에서 고로 변하고 다시 저로 내려와 끝나는 것 등 세 가지다. 단어마다 고유의 인토네이션이 있지만, 뒤에 오는 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기도 하여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커피’를 주문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이 장음의 단계였다. 한국에도 장음, 단음의 여부로 단어의 뜻이 변하는 것이 있다. 먹는 ‘밤’과 저녁 ‘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처럼 명확히 구분해 쓰지 않는다.
 
나도 평소엔 문맥에 따라 '밤'의 의미를 구분한다. 적당히 발음하는 데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일본어의 장음, 단음은 발음하기도 어렵지만, 듣고 판별하기도 만만치 않다.
 
중급 이상의 실력 전까지는 그냥 다 단음처럼 들렸다. '코우히이'의 네 글자를 일정한 장음으로 발음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통 일본어 고급반에 들어서게 되면서 인토네이션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보다 자연스러운 일본어의 키포인트가 인토네이션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말할 때 높낮이를 신경 쓰면서 말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경험을 통해 몸에 익혀와 굳이 신경 쓰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구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어를 공부하게 되면 그 말을 쓰고 들었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떻게 높낮이를 줘야 할지 모르는 탓에 평소 익숙한 우리식 인토네이션을 넣어 일본어를 발음하게 된다. 그 특유의 억양 때문에, 일본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일본어를 쓰는 한국인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코우히이'에 완벽한 인토네이션을 줘가며 주문하기 시작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이전 초년병 시절보다 현격히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가끔은 두 번 이상 같은 주문을 반복할 때도 있다.

주변 사람 중에 일본인보다 자연스러운 일본어와 발음을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로부터 일본인 노래 강사에게 발음 교정을 받기 위해 돈을 내고 강습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어학적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언제나 부러워했을 정도로 어학 실력이 뛰어났던데다, 나처럼 발음에 대한 애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발음 공부를 한다니,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니, 나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결국 내가 '커피' 하나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던 것은 장음이라던가 인토네이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안일함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일본 전문학교 시절의 스승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일본 생활 27년에 한일 통역, 번역을 전문적으로 가르치시면서 통역 현장에서 아직도 왕성히 활동하시는 유명한 분이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발음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를 털어놓자 스승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약 30여 년을 살면서도, 아직도 일본 방송을 보다 보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단어들이 나와. 그래서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거지. 지금도 통역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부디 모르는 단어가 나오지 않기를, 안 들리는 일본어가 없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통역 부스에 들어가. 네이티브가 아닌 이상 평생 공부해야 하는 것이 어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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