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은 이 거리의 주역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거리의 면면을 나타내는 간판들은 메이드 카페라든가 미미가키미세(남성들의 귀를 여성이 파주는 가게), 만화 전문점이 차지했다.
바로 오타쿠(매니아)의 성지로 불리는 아키하바라 덴키가이(전자제품의 거리)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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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열린 ‘아키바 축제 2012’는 아키바(아키하바라의 줄임말)의 오늘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예시였다.
메인무대에는 아키바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아이돌 여성그룹이 남성들의 환호에 노래와 춤을 선보였고, 메이드 카페 체험 코너라는 펫말 아래엔 귀여운 메이드가 웃으며 남성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자제품이라고는 스피커 시스템을 볼 수 있던 게 다였고, 나머지는 게임과 만화 관련 상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키바 축제 2012'는 이처럼 아키바의 최근 트랜드와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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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아키하바라. 그 변화에는 아키하바라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연계가 중심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AKB48이다. AKB48은 7년 전 아키하바라의 영어 약자를 팀명으로 처음 데뷔했다. '팬들에 다가가는, 팬들과 친밀한 교감을 나누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가진 아이돌이다. 이들은 아키하바라를 찾는 많은 남성을 타깃으로 이곳에 전용 극장을 만들었다.
연습생까지 약 90명의 멤버가 있는 AKB48은 팬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했고, 큰 인기를 모았다. 작년AKB48이 낸 5장의 싱글은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멤버의 CF 출연 횟수는 100회에 육박한다.
연말 주요 시상식의 메인 무대는 그녀들의 차지였고, 일본 레코드 대상도 손에 거머쥐었다. 경제 효과만 작년 한 해 300억 엔이라는 기사(겐다이넷)도 나왔다.
이들의 시작이 아키바에 있는 AKB48 전용극장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지금도 아키바에서 공연을 지속하고 있어 팬들에 다가가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AKB48 외에도 많은 아이돌 여성 그룹들이 이곳을 연고지로 성공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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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B48의 성공에는 아키바의 또 다른 이미지인 '오타쿠의 성지'라는 점을 극대로 활용한 점이 엿보인다.
아키하바라에 오타쿠의 성지라는 이미지가 정착된 계기는 90년대 전후 버블 붕괴였다.
당시 버블 붕괴로 일본의 경제적 세계제패는 끝이 나고 '잃어버린 20년'으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침체는 소비를 급속히 위축시켰다.
아키하바라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이전의 전자제품 양판점들이 줄줄이 도산하게 된다.
대신 빅크 카메라나 야마다 덴키 등과 같은 대형 상점들이 들어섰지만, 대안 컨텐츠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아키하바라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대안이 바로 전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있던 일본의 만화였다. 또한, 컴퓨터와 가정용 게임기의 등장은 아키하바라의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도산한 양판점의 자리에는 만화 전문점과 게임 전문점이 들어섰고, 관련 상품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때부터 아키하바라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라는 색다른 이미지를 가지게 됐고 '오타쿠의 성지'라는 말이 세간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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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카페의 시작은 코스프레다. 일본에서 개최되는 각종 애니, 만화 박람회에서 선보인 메이드 코스프레를 만화(동인지) 기획사들이 기업 홍보용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시범적으로 운용하던 코스프레 카페의 메이드 이벤트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을 계기로 2000년 초반, 아키하바라 곳곳에 메이드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아키하바라는 컴퓨터 중심의 상권에서 콘텐츠 중심 거리로 이동하려던 시기였던 만큼 이보다 좋은 상징적인 심벌은 없었다. 타깃은 만화와 애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찾아 아키바를 찾는 남성들이었다. (소수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메이드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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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꾸준한 인기를 얻는 배경 중 가장 큰 이유는 메이드 카페가 풍속점(일본 성인업소의 속칭)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쿄 곳곳에 이와 같은 컨셉을 이용한 변태적인 풍속점도 다수 존재하지만, 최소한 아키바에서는 건전하다.
손발이 오글거리고 유아적인 부분이 있어 한국인으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곳은 아니다.
메이드 복장과 일본의 오타쿠에 대한 편견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메이드 카페에 대해 오해한다. 한국인에게 없는 감성이고 이해하기 힘든 문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무턱대고 비하하고 욕할 수 있을까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오히려 '비키니 바'나 음란한 욕구를 자극하는 술집이 발달한 한국 쪽이 더 오타쿠적으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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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아키하바라의 오타쿠 이미지는 아마 아키바의 중심거리가 아닌 골목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성인샵에서 온 것이 아닐까.
좁은 가게 통로에 중년 전후 남성들이 AV(성인물) 관련 잡지나 만화를 읽고 있는 서점에 들어서면 책들의 곰팡이 냄새와 함께 남성들의 시큼한 땀 냄새가 확 풍겨 올라온다.
이러한 성인 관련 서점들이 아키하바라 덴키가이에 들어 온 것도 전자제품에서 컴퓨터와 만화, 애니 등으로 아키하바라의 콘텐츠를 바꾸려던 시대였다. 지금은 당당히 아키하바라의 중요 콘텐츠로 자리 잡아 코스프레 의상과 성인 기구 등과 합쳐져 골목뿐만 아니라 중심 상권에서도 큰 간판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성인샵은 중고 서점으로, 판매뿐만 아니라 상품의 구입도 같이 진행한다.
유명 AV나 이제는 보기 힘든 옛날 AV배우가 출연한 작품은 부르는 게 값이다. 만화 역시 마찬가지. 매입 목록과 시세를 보여주는 표가 벽에 붙어있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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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 천국이 실시되는 일요일이면 여기저기 코스프레 모델들이 플래시 세례를 받고 메이드 차림의 아가씨들이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웃어 준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공연을 보고자, 그리고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기고자 아키하바라를 찾는 사람들 앞에 아키하바라는 일종의 편의를 마련해 준다.
물론, 일본 고도성장기의 원동력이었던 3대 가전제품, TV와 냉장고, 세탁기를 사기 위한 사람들로 아키하바라의 거리가 메워졌던 시대가 있었다. 워크맨을 비롯한 전자제품으로 세계의 문화를 이끌어 가던 일본의 상징으로 아키하바라를 꼽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아키하바라=전자제품'이라는 도식이 사라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아키하바라는 만화와 게임, 출판물, 성인물 등의 콘텐츠를 통해 메이드로 대표되는 일본 특유의 문화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제 AKB48로 대표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