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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 앞 오래된 찻집, 70년대 그 시절

교토대생의 교토이야기(2) 자코의 빛 바랜 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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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범(교토대학 2학년
기사입력 2010/10/23 [11:25]

▲교토대학서부강당     ©jpnews

 
교토대 후문 햐쿠만벤 교차로 주변엔 세련된 신생 카페들도 눈에 띄지만, 꽤나 나이를 먹은 찻집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올해로 창업 90주년을 맞이한 신신도 교토대북문점(進々堂 京大北門前)이 그 대표격이다. 교토에 프랑스풍 카페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 신신도는 지금도 제빵 프랜차이즈로 시내 곳곳에 지점을 두고 있다. 그 외에도 손 때 묻은 테이블이 나란히 놓인 장수 카페들이 이곳 저곳에 고개를 내밀며 햐쿠만벤의 풍경을 채운다.

낡았지만 정감 있는 분위기 속에 자리잡은 자코의 빛 바랜 벽지도 그 풍경의 한 조각으로 서있다. 그리고 그 벽지도 새하얗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때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70년대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사건(전국 각 대학에 결성된 학생연합이 참여한 신좌파성격의 전학공투회의가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였으나, 경시청에 의해 봉쇄해제 된 사건)이 도쿄대 투쟁의 해산으로 마무리 지어지자, 전공투운동은 전국에 불같이 퍼져나갔다. 교토대학도 물론 투쟁의 날들을 이어갔다. 그 뒤로도 1970년의 요도호 항공기 납치사건,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등 내외로 여러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의 분위기는 이처럼 ‘대학투쟁’, ‘학생과 국가권력의 싸움’과 같은 과격한 키워드로 요약되는 시기였다. 당시 동경에서 학교를 다니던 대학생이셨던 자코 아저씨께서는 이렇게 회상하셨다.

“학교에 가도 수업하는 날이 별로 없었어. 바리케이드로 대학 봉쇄하고 캠퍼스는 통기타 소리랑 민중가요, 포크 송이 끊이질 않고. 교토대 후문 햐쿠만벤도 전부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었었어.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60년대의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치며 외래 문물도 함께 급격히 유입되었던 이 시기에, 자코 아저씨께서도 그 나름대로 반항의 길을 모색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자코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70년대에 영국을 중심으로 해서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같은 대중음악, 소위 블루스와 락 등이 유입되기 시작했어. 근데 역시 70년대의 배경에는 대학생이라면 반대파라는 이미지가 있었지. 클랩튼이 메이저를 상징한다면, 나는 좀더 원류에 가까운, 그러니까 마이너한 음악을 찾아 듣고싶었어. 1960년대에 보도되던 la폭동이나 흑인 사건들이 오히려 흑인 음악에 대한 동경을 심어줬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으니까.”

접해본 적이 없는 음악, 밀려오는 서양 음악의 본류에 대한 동경은 이처럼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열망을 채울 만큼 많은 정보가 유통되던 시기는 아니었다.

“60년대에 블루스에 관한 정보는 잡지가 유일했는데, 그것 마저도 영국에서 인쇄되는 잡지뿐이었지. 당시에 해외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가까스로 주문을 하고 나서도 두세 달이 걸려 바다 건너 오던 시대였으니까, 잡지를 손에 넣었을 때의 즐거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지. 지금이야 유튜브에서 자판만 두드리면 다 나오지만.”

음악에 빠져서 대학생활을 불태우신 아저씨께서는 졸업 후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신다. 본래 신문학을 전공하신 아저씨는 단순히 “신문사는 재미 없을 것 같아서” 라디오 방송국을 택하셨다고 한다.

“도쿄에 본사를 둔 회사였는데, 난 오사카국에서 일했어. 워낙 규모도 작은 회사였지만 지방에 있다 보니 일거리가 거의 없었어. 그때는 아주 편하기 그지없었어. 「취재」라고 적힌 명찰 가지고 야구장도 공짜로 들어가서 해질 때까지 야구만 보다 퇴근하고, 좋아하는 뮤지션 공연도 명찰 들이밀고 좋은 자리에서 듣다 오고. 아주 천국이었어.”

하지만 라디오 방송국의 파라다이스도 1년을 넘기고 끝이 났다. 역시 학생운동 시절의 문제 등이 겹쳐 회사를 그만두신 후 “음악도 들으면서 일할 수 있는”것을 고민하시다가 카페를 시작하셨다. 그 출발이 자코의 첫 발자국이었다.

“지금이야 유튜브에서 자판만 두드리면 다 나오는” 시대에 살고있지만, 70년대엔 단지 음악을 듣기 위해 가던 음악다방이 대학가에 여기저기 널려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자코 아저씨의 친구분께 당시의 음악다방이란 어떤 곳이었는지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야 레코드 판 가격도 비싸고, 요즘처럼 쉽게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으니까 전부 음악다방에 갔지. 지금이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시끄러운 프리 재즈음악을 들으면서 몇 시간씩 앉아 있었어. 프리 재즈는 그냥 들어도 머리 아픈데, 다들 난해한 철학 책을 한 권씩 붙잡고 심오한 표정으로. 다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으니 커피 한 잔만 시키고 몇 시간을 앉아있으니 주인들은 싫어할 법도 한데, 한 번도 뭐라 한적은 없네.”

이처럼 자코도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다방으로 시작했고, 역시 범상치 않은 레코드 콜렉션을 자랑한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레코드 판을 처음 본 것은 자코와의 첫 만남으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언제나처럼 흘러 나오던 음악 중 우연히 내가 알던 가수의 노래를 듣고 아저씨께 아는 척을 했다.

“이거 엘라 피츠제럴드 아니에요?”

아저씨께서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며 갑자기 나를 2층으로 안내하셨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자코 2층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 사람이 간신히 올라갈 만한 너비의 가파른 계단이었다. 양쪽 벽면엔 해묵은 콘서트 전단지, 앨범 커버, 뮤지션의 사진 등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작은 문을 들어서자 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책장에 가지런히 진열된 lp레코드 수백 장과 공연 실황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역시 영화 포스터, 공연 전단지 등이 벽지를 덮고 있었다. 당연히 영업시간이 아니었던 터라, 불 꺼진 작은 방으로 스미는 오후의 햇살만이 자코 2층을 채웠다. 신비로운 분위기와 함께 세월을 눈 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충분히 감탄을 자아냈다.

자코의 lp콜렉션에도 아저씨의 추억이 담겨있다.

“학생 때는 돈이 하나도 없으니까, 레코드를 산다는 건 꿈도 못 꾸었지. 주로 갖고있던 레코드는 해적판이었고, 그마저도 안되면 라디오를 녹음하는 식으로 자기 콜렉션을 채워나갔어. fm라디오가 시작되면서 음질 좋은 음악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당시엔 앨범 전곡을 끊지 않고 재생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 듣고 싶던 음악이 나올 때면 방송 나오길 기다렸다가 테이프에 전부 녹음해서 콜렉션으로 삼고 하던 때였지.”

본격적인 레코드 수집은 회사에 다니면서 시작하셨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면서부터 레코드와 생활하기 시작했지. 특히 방송국엔 시험방송용으로 테스트 판이 들어오는 일도 꽤 있어서 그걸 모으는 재미도 쏠쏠했어.”

이쯤이면 대충 자코 아저씨가 “보통은 아니신 분”이라는 것을 독자 분들도 눈치 채셨으리라 생각된다. 자코 아저씨의 인물을 알아본 교토대 학생들과의 교류도 그 범상치 않음에서 시작되었다. 그 중심엔 교토대 경음악 동아리가 있다.

“교토대 경음악 애들은 자신들이 하는 음악을 단순한 동아리 차원 이상으로 생각했어. 그 중엔 전업 뮤지션이 된 사람들도 있고. 70년대 락 음악의 여명기에 교토에서 그 중심이 되었던 곳이 교토대학서부강당이야. 서부강당은 학생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특히 놀라운 사실은 대학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손으로 자주적으로 관리된다는 점이야. 지금도 서부강당은 ‘서부강당연합협의회’라는 학생조직이 관리하는데, 격주로 열리는 회의에서 예술적, 문화적으로 양질의 음악, 연극 등이 공연될 수 있도록 엄격히 심사를 거쳐서 작품을 올리게 되어있어. 물론 대관비는 무료에 가까워서 공연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더라도 누구든 시도할 수 있도록 유지되고 있지. 지금도 서부강당은 ‘음악과 문화의 성지’, ‘교토의 정신적 지주’같은 수식어가 붙는 일이 많아.”

경음악 동아리의 코드와 자코의 범상치 않음은 손발이 척척 맞는 조합이었고, 자코는 단순히 커피 마시고 밥 먹는 공간을 넘어 마음으로 엮어진 ‘자코 사람들’이 되었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러서 아저씨는 탄식 섞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셨다.

“근 10년간 일본 대학생들이 너무 많이 변했어. 같이 얘기해도 통 재미가 없어. 다들 자기만 생각하고 바깥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어. 늘어가는 히키코모리도 문제고.”

돌이켜보니 내가 자코에서 만난 사람들 중 내 또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 졸업생이거나 자코력(歷)이 수년을 넘은 대학원생들이 그 주축멤버였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자코 사람은 올해 대학에 입학한 자코 2층 아르바이트 생인 이자키와 에무라 두 친구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아저씨께서는 말을 이으셨다.

“요즘은 유학생들이랑 얘기하는 게 더 재미있어. 확실히 더 적극적이고 바깥 세상에 관심도 많고. 예전엔 이렇게 한국 이야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렇네요, 35년 전에 이렇게 한국 이야기를 하시리라고는 생각 못하셨겠죠.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30년 넘게 이렇게 한 곳을 계속 지키시는 것도.”

“아냐. 처음엔 그냥 몇 년 음악 들으면서 쉬엄쉬엄 하다가 그만두려고 했어. 하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지 뭐.”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자코는 이렇게도 긴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 원동력은 아마도 자코의 지붕 아래에 모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자코의 빛 바랜 벽지에서 사람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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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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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10/10/24 [11:55]
교토가면 자코 꼭한번 들려야겠어요.
자코 아저씨도 궁금하고.
기자님기사 열심히 읽을께요.
123 10/10/24 [18:06]
5년전 일본여행이 생각나는군요. 덕분에 70년대 일본의 분위기를 어렴풋이나마 그릴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근대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즐겁군요.
몰라 10/10/25 [18:07]
다음에 교토에가면 꼭.... ㅋ
우와 10/10/26 [00:05]
다음에 교토가면 꼭 들리고 싶네요 ㅎㅎ 느껴지는것도 많을거 같고 ㅎㅎ
안민호 12/08/27 [17:28]
선진국현상중에 하나죠. 성장정체기다보니 지금하는일말고 더 도전할것도 없고, 굳이 다른일 할생각도 안고, 이상태로 정체되어 계속 가는겁니다. 대개 임대료,인권비때문에 주인이 바뀌는경우가 많은데, 건물이 자기거고, 인권비는 가족이 맡아서 하면, 해결이 되지요. 이런현상은 한국도 90년대부터 생기기시작했습니다. 경제현상은 미국,일본,한국 비슷한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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