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도쿄 도심 중 하나인 시부야. 많은 아가씨들이 화려하게 옷을 꾸며입고 젊음을 발산하는 그곳에서 현기증을 느낀다는 야스다 나츠키 씨(23).
그녀에게 현기증이 나는 이유를 물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니까"
고등학교 2학년때 우연히 간 캄보디아. 그곳에서 그는 인간을 느끼고 돌아왔다.
'jpnews'가 기획한 '평범한 일본대학생을 통해 바라본 일본 사회'의 마지막 주인공은 야스다 씨. 올해 3월 조치(上智) 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한 카메라맨이다. 캄보디아를 다녀온 것은 벌써 스무번 정도 된다.
캄보디아와의 인연은 교육학이라는 그의 전공과 달리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일본의 취재현장 뿐 아니라 이라크, 요르단까지 가게 만들었다.
그는 대학생 때부터 일본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제도언론이 제대로 비추지 않는 해외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대학생이면서도 마이니치, 아사히 신문 등 일본의 주요 일간지에 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의 대학생활과 카메라와의 인연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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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다 씨가 처음 캄보디아를 간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국경 없는 아이들>이라는 npo 단체를 통해서다. <국경 없는 아이들>은 일본 학생을 아시아로 보내서 현실을 배우게 하는 곳. 여름방학 때 열흘간 다녀왔다. 그때 첫인상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뭐랄까, 무엇보다 가족 의식이 대단했어요. 내 나이 또래가 자기 가족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때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게 다였다. 캄보디아를 다녀왔다고 해서 바로 무언가를 해야겠다거나 카메라를 붙잡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전문요리사나 돼볼까 하고 생각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어 요리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다녀온 뒤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대학을 가겠다는 것.
"캄보디아 가서 저의 무지에 대해 실감했어요. 대학 가서 보다 큰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조치대학을 고른 이유는 학비가 싸다는 게 이유였다. 조치대학은 모자가정이면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야스다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덕택에 학비의 상당부분을 면제받았다.물론 고교시절 성적도 좋았다.
그래도 연간 30만엔은 납부해야했다. 1-2학년은 어머니가 내주셨고, 3학년은 절반을 자신이 부담했다. 이후 휴학, 4학년 졸업할 때까지 2년간 전부 자신이 부담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매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원강사. 음식점 등 안한 일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는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오코노미야키(일본식 부침개)집에서 일을 했고, 다시 슈퍼로 가서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야간근무를 했다. 학교에 가서 샤워를 한 다음 도서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출석했다. 제대로 잘 수 있는 날은 주 2-3회 정도.
생활비 등 부모 도움 없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반문한다.
"저는 친구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대학 때 고생하는 것이 한사람의 인간으로서도 훨씬 좋은 게 아니냐고. 오히려 부모에게 의지하는 학생이 저는 더 불쌍한 것 같아요. 자기가 번 돈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이 훨씬 기쁘지 않나요?"
일본대학에서는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무이자 차입도 가능하나 야스다 씨는 빌리지 않았다. 나중에 갚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 이유. 차라리 일을 해서 빚을 지지 않도록 했다.
입시 공부가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입시 직전인 크리스마스 때도 놀았어요.일본 입시고등학교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제가 다닌 곳은 중견 입시고교였습니다. 보통 일본 입시고교에는 천재형 진학교가 있는데 그야말로 천재들이니까 동아리 활동 하고 그럽니다. 수재들이 모인 곳은 잘 놀지도 못하고 공부만 하죠. 그런 곳은 재미가 없죠."
즉, 진짜 똑똑한 학생은 공부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일본 고교생활의 꽃은 동아리활동(部活)이다. 야스다 씨는 담당교사의 지시에 따라 배구부 부장을 맡았는데 즐거웠다고 한다. 그녀가 참가한 곳은 사회인도 참가할 수 있는 열린 동아리. 네트워크가 작은 곳에 속박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캄보디아를 다녀오기 전까지 대학에 대한 동경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장 재미 있던 것은 교육철학 수업 등 제미(연구테마를 정해서 공부하는 것) 합숙. 그녀가 발표한 테마는 '생과 사','말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이었다. 나름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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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녀가 사진에 빠지게 된 것은 시부야 아츠시(35)라는 인물을 알게 돼서부터다. 대학교 2학년때 npo 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시부야 아츠시는 1999년 오사카의 홈리스를 촬영, 국경없는의사단 주최 포토 저널리스트 상을 수상한 인물로 2000년 일본사진가협회전 금상을 받았다. 그동안 케냐, 에티오피아. 앙골라, 중국, 브라질, 캄보디아, 팔레스티나 등을 돌면서 취재를 했다.
그후 그녀는 사진에 빠져들었다. 사진의 매력을 "현지에 직접 본것을 카메라를 통해 무엇인가 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때부터 아시아 각지로 떠났다. 특히 캄보디아, 시리아, 이라크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녀왔다.
"이라크에는 수많은 난민이 있지만, 도시형 난민이 있습니다. 도시형 난민이란 도시속에 잘 보이지 않는 난민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라크 내 현지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이들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중입니다. 예를 들어 시리아는 ngo 활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현지를 다녀와서 찍은 사진은 사진전을 열고 발표했다. 문득, 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일본과 어떤 점이 달랐는지 물어봤다.
"저는 이 나라는 우리와 이렇게 다르다는 말이 싫습니다.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야스다 씨는 한국에도 한 번 다녀왔다. 그런데 흔히 이야기하는 한류스타나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다녀온 것은 미군 문제가 얽힌 매향리와 위안부 할머니가 계신 나눔의 집이었다.
"원래, 한국에 대해서 엄청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저와 같은 세대의 생활, 생각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서울의 달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죠. 명동은 조금 걸었는데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한류 붐 같은 것은 전혀 흥미가 없고요. 오히려 미국과의 문제를 매향리에 가서 실감했습니다"
물론, 동방신기 같은 동세대 연예인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녀가 사진으로 생활비를 벌게 된 것은 사진전을 열고나서부터다. tbs에서 그녀의 전시회를 소개해줬다. 그 후부터 대담 사진을 찍는다거나 유명한 정치인을 찍으면서 오퍼를 받게 됐다. 사진을 하다보면 돈이 되는 그라비아 아이돌도 찍을 법 한데, 안 찍었다. 흥미가 없없기 때문.
그녀가 여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아시아의 난민이나 일본의 빈곤, 홈리스 문제 등이다. 그런 고민은 직접 찍은 사진과 기사로 표출했다. 잡지 아에라에 작년 11월에, 이와나미 서점이 발간하는 월간지 '세카이'에도 3월에 자신이 쓴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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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동포 3세? 일본인? 그녀의 아이덴티티는?
야스다 씨의 아버지는 중 2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재일교포 2세였고, 일본인인 어머니는 생협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가 한국 국적이라는 것을 오빠가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알게 됐다.
아버지가 재일동포였다는 것에 싫었던 경험은 없었는지 물었다.
"상처 받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렇게 묻고 싶어요. 사람들은 국가, 국적 등 실태가 없는 것에 왜 그렇게 고집하는 걸까요."
한때 일본에서 자이니치(재일교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였다. 2000년 들어서 추상적인 민족애 보다 재일코리안이라는 정체성에 주목한 영화가 나왔다. 고(go), 박치기 등이 그런 영화다.
"말씀하신 그런 영화를 저도 보았어요. 그런제 저는 그런 영화 보다 '안녕 기무치'라는 영화를 더 감명깊게 봤어요."
'안녕 기무치(あんにょんキムチ)'란 2000년에 만들어진 영화로 역시 재일코리안의 정체성을 다뤘다. 재일동포2세를 부모로 둔 주인공은 매일 집에서 먹는 김치를 싫어했고, 한국도 싫어했다. 초등학교 때 '일본의 과거에 한반도를...'이라는 부분이 나오면 일본인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던 인물. 그러던 그가 일본영화학교에 들어가면서 스스로 재일코리안임으로 자각하고 커밍아웃. 그토록 싫어했던 김치를 먹게 된다. 자신의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녀가 나라를 따지지 않는 아이덴티니를 갖게 된 것은 이런 가정 환경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 야스다 씨는 재일동포들이 개최하는 이벤트도 자주 참석한다. 원 코리아 페스티벌, 재일 코리안 영화제 등.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은 카메라맨 선배들이 만든 회사다. 회사라기 보다는 사진을 판매할 때 개런티 등을 교섭하고 일을 찾아 주는 곳으로 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그래서 급여도 그때그때 다르다. 60 만엔을 버는 달도 있고, 전혀 수입이 없는 달도 있다. 성격이 낙천적이라 그런지 장래에 대한 걱정은 없다고 한다.
사진이 중심이 되겠지만, 앞으로 동영상도 찍고 싶다고 하는 그녀. 그러나 비디오 저널리스트까지는 아니라고. 아프가니스탄 문제도 선배들이 찍어왔는데 자신도 이어서 해보고 싶다고 한다.
"다른 곳이 보도하지 않으니까 제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녀의 일상?
"옷이요? 안 사요. 남자친구가 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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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그녀와 인터뷰한 곳은 남자친구의 집이었다. 남자친구는 교도통신의 카메라맨. 작년 1월부터 남자친구가 살기 시작한 곳에 가끔 들러서 묵고 가다가 지금은 짐을 이곳에 부려놓았다. 2년전 포토저널리즘 워크숍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인상이 나빴는데, 자주 만나게 되다 보니 친해졌어요. 처음에는 프라이드가 강해서 싫었어요."
지금은 어머니도 둘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흔히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를 생각하면 오산. 두 사람이 각자 취재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따로 시간을 내서 데이트하기는 어렵다. 주 1번 정도 밥을 같이 먹는 정도다.
"저는 디즈니랜드 같은 곳이 싫습니다. 마우스가 두 다리로 보행하는 것 자체를 보는 것이 괴로워요. 왜 사람들에게 허황된 꿈이나 이런 것을 심어주는 것일까요."
인터넷은 하루 2시간 정도 하고 블로그, 트위터도 한다. 주로 일과 관계된 메일을 이용한다고 밝혔다.
◆ 마음의 빈곤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늘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야스다 나츠키 씨. 끝으로 그의 사진 출발점이었던 캄보디아에 대해 재차 물었다. 대체 그곳의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냐고.
"늘 듣는 질문인데, 늘 답하면서도 한마디로 답하지 못하겠네요. 음....인간이 가진 희망이 거기에 있고, 반대로 생명의 존엄 같은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일본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덧붙였다.
"잘 안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빈곤이란 그렇게 간단히 해결이 안되는 것이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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